판결문을 위한 변명
상태바
판결문을 위한 변명
  • 법률저널 편집부
  • 승인 2013.08.30 13: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장욱 서울중앙지방법원 판사

 

판사와 관련하여 흔히 쓰이는 말 중에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는 말이 있다. 판사에 대한 내부적, 외부적 평가의 중요한 기준이 판결이라는 일반적인 의미 이외에도 요즘은 법정에서 당사자의 언행이 적절치 못하더라도 재판 진행 과정 중 괜히 흥분해서 막말 판사가 되지 말고 판결로써 당사자의 잘못을 논리적으로 설득시키라는 의미로 사용되거나 재판 업무 이외의 정치적 언급 등은 자제하고 판결문이나 열심히 쓰라는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는, 어쨌든 판사로서는 상당히 부담스런 말이다.
물론 당사자 본인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이처럼 판사에게 있어서도 판결은 중요한 의미가 있기에 판결문 작성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게 되는데, 그만큼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판결문을 쓰고 있느냐고 자문하면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처음 단독판사가 되고 난 후 꽤 오랫동안 내가 작성한 판결문의 검토를 아내에게 부탁한 적이 있다(요즘은 좀 봐달라고 하면 말로만 알았다고 할 뿐, 초심을 잃은 게다). 아내는 법률전문가가 아니므로 당연히 판결의 내용보다는 그 형식에 초점을 두고 문장이 이해하기 쉽게 쓰였는지, 오탈자는 없는지 등을 위주로 검토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오탈자 정도만 수정할 것이라는 나의 예상과는 달리 문장이 너무 길어 전혀 의미를 알 수 없다는 둥, 국어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이 맞느냐는 둥 예상치 못한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아내가 비판을 가하는 문장들은 사법연수원 교재에 있는 문구부터 대법원 판결을 인용한 것까지 전방위적이었다. 어이 그건 내가 쓴 부분이 아니라고 변명해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처음에는 법률용어가 생소하여 그런 것이려니 했으나 아내의 비판을 받은 문장들을 다시 보니 자연스럽지 않은 부분들이 눈에 띈다. 사법연수원 시절부터 10년 가까이 그런 문장들을 계속 접하다 보니 익숙해져 있던 것일 뿐. 그런데 문제는 이런 비판을 하는 사람이 아내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친구나 친척 중에서도 법률전문가는 아니지만, 직업상 또는 개인 사정에 의해 우연히 판결문을 접하게 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내와 유사한 비판을 한다. 그렇다면 나 혼자만의 문제는 아닌 게다(역시 혼자 죽을 순 없다).


그들의 비판 중 가장 대표적인 3가지만 뽑아 보자면 글자만 한글뿐인 법률용어들, 문장의 끝을 알 수 없는 만연체 문장, 그리고 일반적으로 잘 사용하지 않는 판결문 특유의 상용구이다.


먼저 법률용어 문제는 일제 침략기 시절 조선민사령에 따라 의용 되던 일본 민법의 많은 부분이 현행 민법에 그대로 수용되다 보니 일본식 용어들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일상생활에서 잘 사용되지 않는 단어들이기 때문에 법률전문가가 아니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일본어의 잔재들은 우리말로 순화시키는 작업이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으니 언젠가는 개선될 문제이나 현행법 조항에 사용되고 있는 법률용어들을 당장 다른 단어로 대체할 수는 없으므로, 현 상태에서는 결국 판사가 재판을 진행하면서 어려운 법률용어는 당사자들에게 그 의미와 요건, 효력 등을 자세히 설명해주는 수밖에...


두 번째는 만연체 문장으로서 가장 많은 비판을 받는 부분인데, 현재 법원 전체적으로도 판결문 간이화 등을 통해 개선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으니 앞으로는 간결한 문장의 판결문을 자주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좀 오래된 것이긴 하지만 한 문장이 무려 3~4장 이상 계속되는 판결문도 본 적이 있는데, 이쯤 되면 일단 주어와 술어의 호응을 맞추기가 만만치 않아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모두 힘들어진다. 나 역시 간결한 문장의 판결문을 선호하는 편이나 판결문의 문장이 길어지는 이유에 대해 나름대로 변명을 하자면, 간결한 문장으로 판결문을 작성하다 보면 논리적 연결고리가 끊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증거가 없어 특정 결론을 이끌어 내기 위해 여러 사정들(간접사실)을 나열하는 경우가 특히 그러한데, 그런 경우 문장을 끊어 쓰게 되면 괜스레 한 문장으로 이어 쓰는 것과는 다른 뉘앙스를 띄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다고 간결한 문장을 사용하면서 각 문장의 논리적 연결을 위해 접속사를 사용하면 같은 접속사가 반복되어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게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라면 눈 질끈 감고 길게 쓴다. 물론 한 문장이 3~4장까지 되지는 않도록 조심하면서.


마지막으로 판결문 특유의 상용구로서 ‘살피건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과 같은 표현들이 대표적이다. 요즘은 이러한 표현들을 사용하지 않는 판결문도 많지만, 내가 사법연수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교재에 버젓이 실려 있던 표현들이며, 심지어 시험 볼 때 빠뜨리면 감점의 요인이 되기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로서는 위와 같은 표현들을 사용하는 편이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데 법률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예를 들어 ‘살피건대’ 같은 경우는 도대체 뭘 살피냐는 둥, 권위적이라는 둥, 갑자기 생뚱맞다는 둥 마음에 안 드는 이유도 여러 가지이다. 물론 위와 같은 표현들을 사용하지 않아도 별다른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녀석들도 나름대로 기능을 하고 있다(그러니 사법연수원 교재에까지 실리며 버텨오지 않았겠는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이라는 표현은 피고의 항변을 전제로 이에 관한 판단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일단은 원고의 주장이 맞다는 잠정적인 상태를 나타내고 있으며, ‘살피건대’는 일반적인 법리 등을 검토한 후 당사자의 주장에 대하여 드디어 구체적인 판단이 시작된다는 주위환기의 의미가 있다고는 하나, 역시 법적 의미에 별다른 차이가 없고 당사자들이 이상하게 받아들이는 표현이라면 아무래도 그 사용을 자제하는 것이 맞겠다.


두서없이 판결문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썼지만 역시 옛 표현에 익숙한 자의 비겁한 변명일 뿐이다. 혹시라도 이 글을 보시는 분이 계신다면, 판사들이 성의가 없어서 문장을 길게 늘어놓는다거나 잘난 체하려고 자기들끼리만 아는 어려운 용어를 사용한다고만 생각지 마시고, 판사들 나름대로 판결의 정당한 결론이나 내용의 충실함뿐만 아니라 그 형식까지도 고민하고 판결문을 작성하고 있구나라는 정도로만 이해해 주셨으면…. 그나저나 다른 건 다 자동화되는데 왜 판결문 자동 작성 시스템은 개발이 안 되는 건지? 개발되면 오히려 밥 벌어 먹고살기 어려워지려나….

<서울중앙지방법원 홈페이지 소통광장 법원칼럼 중에서>

xxx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전달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하시겠습니까? 법률저널과 기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기사 후원은 무통장 입금으로도 가능합니다”
농협 / 355-0064-0023-33 / (주)법률저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공고&채용속보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