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허공에 쌓는 탑, 죽은 기자의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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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허공에 쌓는 탑, 죽은 기자의 사회
  • 법률저널
  • 승인 2013.08.15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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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 교수 / 변호사 / 시인

 

허공에 외치는 소리는 강하다. 허공에는 모든 것이 존재한다. 허공은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들은 허공의 저 엄청난 흡입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허공으로 소리가 사라질 뿐이라고 착각한다. 그렇지만 허공 속의 소리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쌓이고 쌓여 먼 훗날 탑으로 그 모습을 나타낸다. 소리는 그렇게 영험한 것이다. 매일 새벽 기도하는 이 땅의 어머니들의 기원이 그렇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이 탑돌이를 하고 있다. 두 손을 합장한 채 탑을 돌고 돈다. 수많은 사람들이 새벽마다 두 손을 모으고 무릎 꿇고 기도한다. 잠들기 전에 기도하고 잠깨어 기도한다. 소리는 그렇게 쌓이고 쌓인다. 염원이 모이고 모여 도도한 물결이 되고, 그 물결은 언젠가 세상을 바꾸는 원동력이 된다.


소리 이전에 촛불이 있다. 모든 이는 소리를 내기 전에 촛불을 켠다. 기도하기 전에 촛불을 켜고, 제사를 드리기 전에 촛불을 켠다. 신부님도 미사를 올리기 전에 촛불을 켜고, 신랑과 신부도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촛불을 켜다. 어둠을 밝히기 전에 촛불을 켜고, 태양빛이 있는 대낮에도 촛불을 켠다. 부처님께 기도하기 전에 촛불을 켜고, 예수님께 기도하기 전에 촛불을 켠다. 어둠을 밝히려고 촛불을 켜고, 대낮을 밝히려고 촛불을 켠다. 촛불은 어둠을 밝히고, 마음을 밝힌다. 촛불을 드는 손은 모두 경건하다. 촛불을 들어보지 않는 자는 촛불의 경건함을 알지 못한다. 촛불의 위대함을 알지 못하고, 촛불의 진실을 알지 못한다. 촛불을 켜면 어둠이 물러가고, 혼을 밝힌다. 촛불을 켜는 순간 인간은 순결해지고 엄숙해지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국민들이 부르짖는 정의와 힘 있는 자들이 억압하는 정의가 서로 달라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처지에 따라 정의의 정의가 서로 다르니, 진정한 정의가 외롭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귀는 이미 귀가 아니다. 빛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눈은 이미 눈이 아니다. 민심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위정자는 이미 지도자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나 다름없다. 문제는 소리가 들리는데도 소리의 의미를 모르고, 빛이 보이는데도 빛의 의미를 모르는 위정자가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상권력은 참으로 무상한 것이다. 권불십년이라 했고, 화무십일홍이라 했다. 물론 현재 권력의 힘은 쎄다. 강하다. 엄청나다. 그렇지만 세상 어떤 권력도 시간을 비켜갈 수 없고, 소리를 비켜갈 수 없고, 빛을 비켜갈 수가 없다. 그러기에 역사는 공평한 것이다. 시인의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50여 년 전 어머니께서 혼자서 중얼거리듯 어느 경찰을 향해 내뱉던 한 마디 욕설, “개 같은 놈!”이라는 욕설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소리의 힘은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부모님께서 단독주택을 지으셨다. 한 해 전 온 동네가 화재로 불타버린 후 동네 사람 모두가 일 년 가까이 구호용 천막생활을 하다가 부모님께서 어렵게 마련된 돈으로 동네에서 가장 먼저 집을 지으셨던 것이다. 집의 기초를 놓고 벽돌을 쌓아가던 중 어느 날 경찰이 와서 공사를 중지하라고 요구하면서 이것저것 트집을 잡았다. 지금 내가 법률가가 되어 그 상황을 상상해보면, 건축법을 문제 삼아 이런저런 트집을 잡지 않았나 싶다. 시청 공무원이 아닌 경찰이 와서 시비를 걸었던 것이 지금도 이해가 안 가지만, 하여튼지간에 벽돌을 쌓던 아저씨는 더 이상 공사를 계속하지 못했고, 속이 답답해터진 어머니는 그 경찰에게 통사정을 했지만, 그 경찰은 막무가내였다. 할 수 없게 된 아버지께서 그 경찰에게 3천 원을 집어주고서야 공사를 계속할 수 있었다. “오상, 이제 공사하시오!”라고 반말로 아버지께 공사재개를 허락하며 돈 3천 원을 받아가던 경찰 뒤통수에 대고, 어머니께서 하셨던 욕설이 “개 같은 놈!”이었다(그 경찰 입에서 오씨가 아니라 오상이라는 말이 나왔던 것을 보면 일제시대 무언가 했던 사람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지금 새삼스럽다). 50여년 가까운 세월 저 편, 3천 원은 얼마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을까? 지금도 종종 생각해 본다. 그러면서 나는 지금도 간혹 혼자 부정한 행위가 존재하는 곳에서 “개 같은 놈!”이라는 욕설을 하곤 한다. 물론 아무도 들리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천지신명께서 들으실 수 있는 곳에서 그분들더러 들으라고 그런 욕설을 한다. 힘없는 아버지처럼 경찰에게 돈 3천 원을 집어 주어야 했던 그러한 설움이 있는 곳에서 나는 그런 욕설을 하곤 한다. 그러면 그 욕설이 쌓여 언젠가는 탑으로 나타나리라 믿는다. 


그렇지만 지금의 나는 50여 년 전 아버지처럼 경찰 호주머니에 3천 원을 결코 꾸겨 넣어주지 않는다. 그런 일이 있으면 그냥 시간이 걸릴지라도 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해보고, 안 되면 그만 두는 쪽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곳곳에 그 예전의 경찰 같은 이들이 넘쳐나고 있다. 정상적인 것이 아닌 비정상적인 것을 탐하는 자들은 모두 그 예전의 경찰과 같은 자이고, 내 어머니와 같은 처지에 있는 모두는 그를 향해 지금도 “개 같은 놈!”이라고 욕설을 할 것이다.


동네 강아지에게는 “동네 강아지의 원칙”이 있다. 골목길을 들어서는 자가 있으면 그가 누구이든 일단 짖는다는 것, 그리고 자기 주인에게는 한 없이 꼬리를 흔드는 원칙 말이다. 그래서 동네 강아지는 전설 속의 강아지가 되는 것이다. 자기 영역을 침범하는 자를 향해 그가 누구이든 일단 짖기 때문이다. 자기 할 바를 다 하기 때문이다. 물론 주인에게 꼬리를 흔든다는 점에서 충성스럽다. 동네 강아지가 짖지 않으면, 그는 더 이상 강아지가 아니다. 강아지보다 못한 놈일 뿐이다. 주인을 향해 충성스럽게 꼬리를 흔들지 않으면 그도 더 이상 동네 강아지가 아니다. 그 역시 동네 강아지보다 못한 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아지 중에는 주인에게는 충성스럽게 꼬리를 흔드는 것은 잘 하는데, 동네 골목길을 침범하는 자를 향해 짖지 못하는 강아지가 있다. 그 강아지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국정원의 제18대 대통령선거에 대한 댓글공작정치, 다시 말해 공무원의 불법관권선거개입을 규탄하며, 촛불집회가 서울광장에서 대대적으로 열리고 있다. 발표기관에 따라 참석인원이 10만 명에서 1만여 명으로 셈법이 제각각이지만, 수만 명이 모이는 대대적인 집회에 대한 케이비에스, 엠비시, 에스비에스, 연합통신 등의 보도태도를 보면 “동네 강아지만 못한 기자”들이 넘쳐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미 인터넷상에서는 공영방송들의 촛불집회에 대한 축소보도 내지는 무시보도상황에 대한 우려의 의견표명이 많은 상태이다. 어떻게 10만 명에 이르는 국민들이 모여 촛불을 들고 국정원의 정치개입을 비판하고, 국정원개혁을 부르짖는 민심을 한 줄짜리 보도자료로 평가절하해 버리거나 보도자체를 안 해버리는 황당한 보도태도를 보일 수 있는가 말이다. 짖을 줄 모르는 개는 이미 개가 아니다. 기자가 국민의 중요관심사항에 대하여 보도하지 않으면, 국민의 행동하는 양심을 심층보도하지 않으면 그는 이미 기자가 아니다. 물론 처음은 아니겠지만 수십 년 만에 시국선언을 처음 하는 것이라며 천주교대구교구 신부들의 시국선언까지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시민들이 금단의 땅이었던 국정원 본부 및 지부 건물 앞에서 국정원의 불법선거관여에 대한 성토가 이어지고 있는데도, 이러한 사실들을 심도 깊게 보도하지 않는 케이비에스, 엠비시, 에스비에스 기자들은 모두 정신이 죽어버린 기자들이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수많은 일반시민들조차 진실을 밝히고자, 민주주의를 짓밟은 국정원의 정치개입사건에 대하여,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도둑맞았다며 이를 되찾아야 한다고 민심은 들끓고 있는데, 이를 제대로 보도하지 않은 공영방송은 이미 공영방송이 아니라 죽은 방송일 뿐이다.


68주년 광복절을 맞이하는 2013년 8월 15일을 전후한 대한민국은 “죽은 기자의 사회”가 되어 버렸다. 아마 35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살아 계시다면 그 뇌물 3천 원을 받을 때까지 집요하게 공사를 방해하던 경찰에게 “개 같은 놈!”이라고 거침없이 욕설을 내뿜던 어머니께서 살아 계시다면 아마 지금의 보고가치를 왜곡하는 수많은 기자들을 향해서도 “동네 강아지만도 못한 놈!”이라고 한 마디 하시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일부 기자는 기자정신으로 똘똘 뭉쳐 진실을 파헤치고자 몸부림치고 있다. 그런 정의가 살아 있는 기자를 향해서는 박수를 쳐주고 싶다. 그렇지만 정의를 지키기 위해, 민주주의를 확립하기 위해 짖을 줄 모르는 기자는 이미 기자가 아니다. 주인을 향해서만 꼬리를 흔들 뿐 침입자를 향해 짖을 줄 모르는 강아지는 이미 도둑으로부터 주인을 지킬 수 없다. 주인을 향해 꼬리를 흔드는 것이 오히려 주인에게 해가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강아지는 이미 강아지가 아닌 것이다. 그런 기자들이 넘쳐나고 있는 세상은 죽은 기자의 사회일 뿐이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 “죽은 기자의 사회”는 “산 시민의 사회”를 만들고 있다. 기자가 죽으니 시민이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저 촛불집회를 통해 밝혀지고 있는 촛불들, 허공에 외치고 있는 것 같지만 허공 속에 축적되어 쌓이고 있는 소리의 탑은 어느 한 순간 메트리스 속의 거대한 제국처럼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렇게 거대한 정의의 제국의 탑이 우리 앞에 홀연히 나타나게 되면 그때서야 “죽은 기자들의 놀라운 변신”이 시작될 것이다. 원래 낯선 자를 향해 짖지 않는 자들은, 그 주인이 누가 되든, 옛 주인이든 바뀐 주인이든 신나게 사정없이 꼬리를 흔들어 대기에 변신이 가능할 것이다. 물론 그러한 “죽은 기자의 변신”은 우리 모두를 슬프게 하겠지만 말이다.


허공에 외치는 소리는 강하다. 내 어머니께서는 허공중에 외치셨다. 그 경찰의 뒷통수에 대고 외치셨던 한 마디 “개 같은 놈!”이라는 말은, 그 일이 있고 3년쯤 지난 후 그 경찰이 여기저기에서 뇌물 받은 사실이 밝혀져 형사처벌 받는 일로 일단락이 지어졌다. 중학생이 된 나를 향해 어머니께서는 의기양양하게 말씀하셨다, 그 경찰 놈, 개 같은 놈이 형무소 갔다고. 그때 들었던 어머니의 욕설은 지금껏 내가 들어본 가장 좋은 노랫말이었다. 귓가에 울려 퍼지는 베토벤의 운명 같은 교향곡 같은 황홀한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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