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이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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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이 필요해
  • 법률저널 편집부
  • 승인 2013.07.19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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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정 서울중앙지방법원 판사

 

힐링(healing). 몸과 마음의 치유를 뜻하는 이 단어는 최근 몇 년간 우리 주변에서 가장 많이 찾아볼 수 있는 단어가 되었다. 힐링을 위한 책, 힐링을 위한 음악, 힐링을 위한 여행... 현대인들에게 힐링은 이제 선택이 아닌 의무가 되어버린 것 같다. 스스로를 치유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만큼 각박하고 고된 세상살이의 무게가 우리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급기야 힐링이라는 이름을 전면에 건 ‘힐링캠프’라는 예능 프로그램이 등장하였다. 연예인 등 유명인사를 초대하여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이 프로그램은 진행자가 이야기의 흐름을 주도하는 여느 토크쇼와는 형식을 달리한다. 게스트가 자신의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내놓으면 진행자들은 함께 울고 웃으며 공감하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 속에서 경청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통하는 것이 건강한 것이고 통하지 않는 것(不通)은 병든 것이라는 말이 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주변과 소통하여야 하고, 그 소통의 첫걸음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이다. 경청이란 상대방의 말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전달하고자 하는 말의 내용은 물론이며, 그 내면에 깔린 동기나 정서에 귀를 기울여 듣고 이해된 바를 상대방에게 피드백(feedback)하여 주는 것을 말한다. 나의 귀를 열면 상대방은 마음을 열고 나에게 다가올 것이므로 서로의 이야기를 경청하면 서로의 마음을 나누며 상처를 보듬을 수 있고, 그 순간 치유는 시작되는 것이다.


법원은 다양한 당사자들이 서로 다른 이야기, 다른 상처를 품고 모이는 공간이다. 법원은 당사자들이 갈등과 분쟁을 사적인 영역에서 해결하지 못할 때 최종적으로 법적인 판단을 받기 위하여 찾는 공간인 만큼, 법원을 찾는 당사자들의 상처의 골은 깊을 수밖에 없다. 진행되고 있는 재판을 법대 위에서 바라보노라면 당사자들이 귀를 닫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은 채 판사를 향해 자신의 이야기만을 하고자 하는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다.


판사가 아닌 당사자의 위치에서 재판을 직접 경험해 보지는 못하였지만, 당사자가 되어 재판을 경험한다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라고 한다. 그와 같은 순간에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바람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법정에서는 서로의 이야기와 마음이 통하지 않게 되는 것이고, 법정이야말로 가장 치유가 필요한 공간이 되는 것이다.


판사로서 오랫동안 근무한 것은 아니지만, 기억에 남는 몇 번의 순간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원고가 피고에게 물품대금의 지급을 구하는 사건의 조정절차를 진행하던 때이다. 원고가 피고에게 오랜 기간 물품을 공급하였으나 피고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으며 물품대금을 지급하지 못하여 소송에까지 이르게 된 사건이었다. 조정절차를 진행하기에 앞서 사건을 파악하기 위하여 기록을 검토하였는데, 당사자들이 제출한 서면에는 사실관계에 대한 주장이 아닌 상대방에 대한 원망과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내용이 가득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조정실에서 만난 당사자들은 만난 순간부터 서로에게 언성을 높이기 시작하였다. 당시 초임판사로서 조정절차를 진행해 본 경험이 많지 않던 나는 이 조정절차를 어떻게 진행할지 막막하였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는 일부터 시작하자고 생각하였다. 당사자들에게 발언의 기회를 동등하게 드릴 터이니 상대방의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줄 것, 다만 이야기를 함에 있어 감정적인 발언은 하지 말 것을 요청하였고, 당사자들은 이러한 요청에 따라 자신들의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원고는 신뢰를 저버리고 소송에까지 이르게 한 피고에 대한 서운함을, 피고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알면서도 기다려주지 못했던 원고에 대한 서운함을 솔직하게 토로하였다. 결국 그 사건은 피고가 원고에게 감액된 금액을 지급하는 것으로 조정이 성립되었고, 원고와 피고는 서로에게 그동안 미안했다는 말과 함께 악수를 건넸다.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공감하며 듣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던 나의 노력이 당사자들이 마음의 문을 여는 것에 조금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마음의 문을 연 당사자들이 서로의 이야기를 경청하면서 소통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 원고와 피고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조정실 문을 나설 수 있었을 것이다. 법원은 기본적으로 당사자들의 분쟁을 법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공간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들의 상처가 치유되는 힐링의 공간이었을 것이다.


법률지식 이외에도 판사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꼽히는 것은 바로 경청하는 자세이다. 판사가 당사자의 이야기를 경청할 때, 판사는 당사자들의 진실한 이야기를 듣고 사실관계를 판단하는 중요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고, 당사자는 재판절차에서 자신의 권리가 보장받고 있다는 절차적인 만족감과 더불어 나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상대가 있다는 점에 대한 정서적인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초임 법관으로 임명될 때, ‘나에게는 수많은 사건 중 하나이지만, 당사자들에게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사건이다’라는 생각을 잊지 않고 당사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판사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재판일정과 책상에 쌓여있는 수많은 기록 속에서 초심을 잃게 되는 순간이 올 때도 있지만, 항상 초심으로 돌아가 당사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많은 판사가 기록 속에 담긴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재판을 통하여 당사자들의 상처가 조금이나마 치유될 수 있기를 바라는 판사들의 목소리가 당사자들의 마음에 닿을 때 법원과 당사자들의 소통은 시작될 것이다. 당사자들과 소통하는 힐링법원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서울중앙지방법원 홈페이지 소통광장 법원칼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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