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회 외무고시 합격수기 -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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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회 외무고시 합격수기 - 기적
  • 법률저널
  • 승인 2003.07.22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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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우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재
현재 공익근무요원


기적


4월 13일 마지막 시험을 마치고 시험장을 나오면서, 나의 얼굴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미소가 만개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모든 힘이 소진되어서 지칠대로 지친 몸이었지만, 기분만은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

최종합격자 발표가 났을 때 나는 누구보다도 이를 먼저 알았다. 내가 공익근무를 하는 곳이 행정자치부인데, 우리 사무실의 공무원 한 분이 일찍 알려주신 것이다. 그 순간 나의 머리 속에는 지난 수년간의 시간이 홍수처럼 밀려와 펼쳐졌다.

수기를 써 달라는 말을 듣고 나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답했지만, 막상 쓰려니까 부끄러운 마음에 혼자 얼굴이 붉어진다. 합격수기란 본래 고시공부를 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어야 하는 것인데, 과연 나의 글이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 생겼다. 그러나 한편으로, 특수한 상황에서 공부를 하였던 나의 생활이 오히려 수험생활을 하고 계신 여러분에게 작게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에 용기를 얻어, 지난 몇 년간의 생활을 기술해 보고자 한다.


1. 멋모르던 시절


내가 대학에 입학하였던 97년 당시, 나는 도무지 공부라고는 하지 않는 불성실한 학생이었다. 날이면 날마다 부지런히 놀면서 수업은 빼먹기를 밥먹듯 했고, 심지어 중간고사 시험 전날 새벽까지 놀다가 시험 당일에는 자느라고 시험을 치지 못 하는 어이없는 일도 있었다. 물론 요즘에는 이러한 신입생들이 거의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세칭 일류대를 졸업하면 취직은 보장된다는 생각을 누구나 가지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98년으로 넘어가면서 외환위기가 닥쳤고, 부모님의 사업도 이에 직접적이고도 결정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다. 한 순간에 아버지의 회사가 사라지고 생활비를 감당하지 못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바로 지난 해까지 부족함 없이 용돈을 펑펑 쓰던 나로서는 적응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우리 집은 부산이기 때문에 나는 혼자 서울에서 살고 있었는데, 하숙비를 내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어머니께서는 군대를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조심스레 말씀하셨는데,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이렇게 훌쩍 군대를 다녀오면, 그 다음에는 또 어떻게 할거란 말인가? 심리학과인 나는 법학과나 경영학과 학생들처럼 그리 장래가 밝지도 못 하였다. 그리고 나는 그 때를 즈음하여 무언가 해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1학년은 신나게 놀았으니 이제는 큰 일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자연스레 나는 고시로 눈을 돌리게 되었고, 우선은 사법시험이 눈에 띄었다. 곧장 사법시험 가이드를 사서 주욱 읽어 보았는데, 큰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외무고시가 정말로 매력적인 것으로 다가왔다. 또한 기왕에 고시를 할 것 같으면, (사법시험을 준비하시는 분들께는 정말로 죄송하다) 사시보다 어렵다고 생각되는 외시를 하고 싶었다. 이렇게 해서 약 한 달간의 숙고 끝에 98년 7월부터 나는 본격적인 고시공부에 착수하였다.
 
2. 첫 번째 좌절


21살 어린 나이에 시작한 수험생활은, 내 딴에는 최선을 다한 것이었지만 객관적으로 보아서 가소로운 것이었다. 차마 말하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허구 헌 날 늦잠을 잤고, 술도 자주 마셨다. 뿐만 아니라 나는 아직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 한 상태에서 공부를 시작하였기 때문에, 하는 짓이나 생각이란 게 사춘기 애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또한 나는 학원도 다니지 않고 스터디 같은 것은 물론 해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누구나 다 하는 서브노트 만들기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하지 않았다. 이렇게 혼자서 책만 들여다보고 공부하는 방식은 나의 수험생활 마지막까지 이어졌다. 물론 후반에 들어서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99년 1차 시험은 사실상 경험을 쌓는다는 데에 의의를 둔 것이었고, 23살에 접어드는 2000년 1차 시험에 나는 모든 것을 걸기로 했다. 99년 봄에는 학교 고시실에 한두 달 정도 몸담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시실 역시 공부를 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는 아닌 것 같았다. 결국 나는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갔다. 그 이후로는 학교 도서관이 내가 공부를 하는 유일한 장소였다.

2000년에 치러진 제34회 시험을 앞두고 나는 나름대로 총력을 기울이기는 하였는데, 그러면서도 늦잠 자는 버릇은 여전하였다. 또한 이 당시까지도 나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지 못 하였고 스스로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 하였다. 말하자면 수양이 덜 된 상태였다.

여하튼 나는 이 해 시험에서 떨어졌다. 커트라인이 82.5였는데 내가 82점이었다. 한 문제가 모자란 셈인데, 나는 이를 대단히 억울하게 생각하였으나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근소한 차이로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는 억울하다는 말을 할 자격이 없음을 알았다. 나는 우선 이모의 도움으로 그 해 1학기 등록을 하고 학교를 계속 다니면서 진로모색을 심각하게 해 보았다.

이 시기는 내가 겪어보지 못 한 시련의 연속이었다. 상황이 안 좋아지려니까 모든 것이 다 최악이었다. 병역 문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것이었고, 집안 사정은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을 만큼 나빠져 있었다. 또한 동생이 이 해에 대학에 진학하게 되어 경제적 압박감은 더욱 심각했다. 한편으로는 집안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격화되어 나에게는 가정이라는 것이 없는 듯이 느껴졌다. 정말이지 도무지 빠져나갈 길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 해 여름, 나는 친구와 함께 공군입대를 신청하였다. 그런데 나는 무슨 뾰족한 수도 없으면서 돌연 입대를 다시 연기하였다. 그리고 바로 이때부터 내 인생에서 전혀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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