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광야에 나부끼는 깃발, 점차 임계점이 낮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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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광야에 나부끼는 깃발, 점차 임계점이 낮아지고 있다.
  • 법률저널
  • 승인 2013.05.10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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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 교수 / 변호사 / 시인

 

광장에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깃발 아래 조용조용 모여드는 군중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 대한민국을 흔들고 있다. 성경은 예수가 나이 서른이 되어 공생애를 시작하는 첫날, 광야에서 40일간 사탄에게 시험받는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가 40일 동안 금식하며 헤매었던 광야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지금도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 예수는 광야에서 돈과 명예와 세상권력의 허무함을 깨닫는다. 사탄이 돌로 떡을 만들라고 할 때,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라 할 때, 세상 모든 권력을 주겠다고 유혹할 때, 예수는 이 모든 것을 부정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강변한다. 예수는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다가, 정의를 부르짖다가 정의가 상실된 로마압제의 세상에서 결국 국가반역죄의 누명을 쓰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 정의를 부르짖는 자는 그렇게 불의의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해 온 것이 역사의 수레바퀴이다. 그렇지만 예수의 광야정신은 지금 21세기 세계 속에 살아 민주와 정의, 인권과 평등의 가르침으로 우리를 교훈하고 있다.


오래 전 필자는 조그마한 컴퓨터 모니터를 “현대판 광장”이라 표현한 바 있다. 그 광장에 네티즌들이 모여 “소리 없는 함성”을 “댓글질”로 질러대고 있다. 소리 없는 댓글질이 천지를 진동하고 있다. 임계점에 달한 임ㆍ계들의 “분노의 저항”이 본격화하고 있다. 법학은 구체적 케이스를 가지고 설명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다보니 사례 속에 항시 갑, 을을 등장시켜 사건을 설명하게 된다. 사건이 복잡한 경우에는 병, 정이 나오게 되고 급기야는 임, 계까지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갑질”과 “을사”라는 말이 최근 유행어가 되어버렸다.  강자로 상징되는 갑의 횡포 앞에 약자인 을이 죽어나가는 현상을 그렇게들 표현하고 있다. 횡포스러운 갑질에 더 이상 을들이 죽을 수 없다며 집단저항하며 나타난 현상이 바로 포스코에너지의 왕상무사건이고, 남양유업 영업사원의 폭언행위에 대한 대리점주의 녹취록공개사건이다. 이 세상은 먹이사슬 세상이다. 꼭짓점에 절대 강자인 갑이 군림하고, 그 아래 을, 병, 정.... 임, 계가 위치하여 차례대로 먹히우고 있다. 절대 강자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한 번은 갑이, 다른 한 번은 을이 되며 살아간다. 마지막 임ㆍ계만은 영원히 약자이겠지만 말이다.


사람들은 공개된 광장에서는 모두 선량하다. 모든 이들이 지켜보고 있는 한에서는 말이다. 그렇지만 감추어진 뒤뜰에서는 이렇게 사람이 잔인해질 수 있을까, 이렇게 탐욕스러워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변해버리기 일쑤이다. 한 얼굴에 두 얼굴의 지킬박사와 하이드가 되는 것이다. 약자 앞에 군림하는 자들이 넘쳐나고 있다. 그 잔인함과 탐욕이 극에 달해 세상 모든 것이 수단화되고, 인본주의가 길을 잃고 있다. 이제 참을성의 임계점에 달한 “임ㆍ계”들의 집단적 저항이 일상화되는 세상이 되었다. 을 정도만 되어도 참고 살 만 하다. 을에게 약자인 병이 있고, 병도 자신에게 약자인 정이 있기 때문이다. 거울 앞에 비치는 슬픈 자화상이다. 이제 어느 누구에게도 강자로 군림할 수 없는 절대 약자인 임ㆍ계들이 “더 이상 수모와 모멸을 참을 수 없고, 부정과 불의와 무모한 압박에 견딜 수 없다.”며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한다. 그 기능을 광장 대신 인터넷 모니터가 하기 시작하였다. 과학문명의 발달은 모이는 것도 쉽고, 함성을 질러대기도 쉬운 세상을 만들어주고 있다.


유치환의 깃발과 최인훈의 광장은 이제 실제로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유치환의 시 “깃발”은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으로 끝맺고 있다. 깃발이 흔들리기 위해서는 맨 처음 깃발을 매달고 흔드는 자가 있어야 한다. 그는 지혜로워야 하고 용기가 있어야 한다. 만일 상황이 잘못되면 만인의 타켓이 되어 곤욕을 치르는 위험에 처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깃발을 흔들기 위해서는 광장이 필요했지만, 인터넷상의 댓글은 그러한 광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동시다발적이다. 게릴라식이다. 인터넷 발달은 광장에서 나부끼는 깃발의 형태를 바꾸어 놓았다. 광장에 실제 모이기 위해서는 몇 날 며칠 깃발을 만들고, 해당자들에게 통보하고, 가슴 가득 두려움이나 설렘을 감추고 장시간 대기했다가 폭발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기에 함께 피 흘리는 과정에서 동지애가 생기고 유대감이 강해지는 특성이 있다. 그렇지만 인터넷을 통해 임계점에 달한 임ㆍ계들의 저항은 사전 준비를 할 필요가 없고, 오로지 “동감”만을 요구한다. 누가 시키지도 않고, 계획을 세우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인터넷이라는 광장에 자발적으로 집결하고, 집결하여 동감의 결집을 이루어내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깃발흔들기가 조직화되지 못한 까닭에 일시적으로 폭발했다가 사그러들고 만다는 점이다. 초기에 그런 현상이 일상화되었다. 그러기에 동지애가 약하고 안개처럼 사라지는 약함을 안고 있다. 그러기에 조직화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동감의 결집”이 점차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네티즌들이 자각하면서 조직화가 태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제 “약한 임ㆍ계”가 살아남기 위해서 광장을 대체한 여론결집장소인 인터넷모니터로 모여들어야 함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자각은 점차 스스로의 임계점 온도를 낮추는 사회적 운동으로 전개될 것이다. 100도가 되어도 끓지 않던 정의의 물, 1,539도가 되어도 녹지 않던 완고한 철광석의 임계점이 점차 낮아지고 있다. 분노의 병목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무조건 참아야 했던, 갑의 을, 을의 병, 병의 정... 임과 계들이 정의 병, 병의 을, 을의 갑에게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사회현상이 경제민주화로 나타나고, 남양유업에 대한 불매운동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이러한 사회적 변화에 민감해진 “갑들”이 집단적으로 대책마련에 나서고 있다. 집단대처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당장은 자신들의 기업을 향한 돌팔매질을 두려워해 입단속, 사람단속을 하고 있지만, 종국에는 돈으로, 권력으로, 정치력으로 을들이, 임ㆍ계들이 자신들에게 대항하지 못하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 할 것이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는 말이 있다. 지금 우리 모두가 그러고 있는 상황이다. 종로에서 뺨 맞을 때는 약한 을이 되었다가, 한강에서 눈 흘길 때는 다시 병 앞에 군림하는 을이 되는 이 모순된 사회가 이번 남양유업사태를 통해 개선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그렇지만 사이버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을들의 반란이 사회적 동력을 얻고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는 시금석으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이들이 구체적으로 조직화를 성공시킬 수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하겠다. 며칠 전 민주당을 탈당한 문성근 전 최고위원이 추구했던 온ㆍ오프라인 당원제도는 현실정치에서 실패하였다. 같은 길을 걸었던 유시민 전 의원이나 진보통합당의 전신인 민주노동당의 온라인 당내선거 역시 실패하였다. 이제 어쩌면 안철수 의원이 꿈꾸고 있는 인터넷을 통한 회원제-나중에는 정당화로 갈 것이지만-정치구상이 가장 근접해 있는 정치조직화 성공 여부라고 하겠다. 만일 그의 정치구상이 현실적으로 성공한다면 제3의 길로 사회변혁을 주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기존의 정당에 가입하여 기존정치철학 속에 용해되어 버리거나 그러한 시도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안철수현상 역시 안개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고, 또 다른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최인훈의 광장은 1950년대의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고발하고 있다. 당시는 모두가 가난하고 못살았기에 경제적 문제는 사회적 이슈가 크게 되지 못하였고 오로지 정치적 좌우이념대립이 중심 갈등요인이었다. 그 결과 좌에도 우에도 치우치지 못했던 한 지식인의 자살로 결말이 나고 있다. 그렇지만 2010년대의 한국사회는 1950년대의 정치적 모순이 해결되지 못한 채 여전히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있고, 거기에 덤으로 경제적 불평등, 사회적 불평등이 추가되어 새로운 사회적 갈등이 증가되고 있다. 그러한 갈등구조 속에서 일 년에 15,000명이 넘는 국민들이 자살하고 있다. 광장 속의 주인공 이명준이 철학적 고뇌 끝에 스스로 자살한 것과 달리, 오늘의 자살자는 경제적 곤궁과 정신적 갈등 속에서 자포자기가 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는 것이다. 지난 60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갑들이 생성되었고, 그 갑들은 이제 난공불락을 자랑하는 견고한 성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갑들의 횡포가 심해지고, 을의 위치에 있는 자들을 영원히 깔아뭉개도 괜찮은 줄 자만에 빠져 있었다. 그런 지나침이 결국 병목현상, 인내의 임계점에 달한 을들의 저항으로 나타나 인터넷을 타고 구체화ㆍ조직화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인터넷문화는 더욱 확장될 것이고, 을들의 결집력은 강화될 것이다. 끊임없이 갑들에 대해 저항할 것이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저항이 성공한다 하더라도 “갑들의 무리” 안에서 갑들끼리의 변동에 그쳐버리고 말게 되면 이는 또 다른 갑의 배를 불려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남양유업의 유제품 불매운동을 벌리더라도 매일유업의 유제품을 사 마실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 이러한 사회구조는 남양유업이 대리점주에게 갑이었듯, 매일유업 역시 대리점주에게 갑인 사실에 변화를 주지 못한다. 여전히 갑은 갑이기 때문이다.


까닭에 을이 계속해서 갑과 대등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제도적으로 시스템을 고쳐 “갑들의 무리”가 “을들의 무리”를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소비자가 왕”이라는 말이 상술이 아니라 진정한 존경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개선책이 경제민주화로 상징되는 “경제적 정의의 실현”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쌍용차사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고, 현대자동차의 비정규직파견근무제도도 개선되지 않고 있다. 열거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수많은 사회적 갈등이 갑ㆍ을관계 속에서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르고 있고, 정의실현의 국가기관인 경찰과 검찰의 편파성은 여전히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내리고 있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 도도한 한강물이 되어 흐르고 있다. 하지만 진정한 사회개혁이 언제쯤 이루어질지, 가능하기나 할 건지 아무도 모른다. 아마, 신도 모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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