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섭의 정치학-보스턴테러, 공포의 새로운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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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의 정치학-보스턴테러, 공포의 새로운 시작?
  • 법률저널
  • 승인 2013.04.19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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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민주주의, 휴머니티

 

신희섭 베리타스 법학원 

 

2013년 4월 15일(미국시간) 미국 보스턴마라톤 대회의 결승점에서 연쇄폭발이 일어났다. 2013년 4월 17일(한국시간) 현재까지 피해자는 3명으로 확인되고 있고 176명이 부상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세 명의 피해자 모두 사연이 있겠지만 그 중 한 피해자는 8살난 소년으로 아버지를 응원하러 갔다가 폭발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보도가 나오고 있다. 마틴 리차드라는 소년으로 이번 사고로 5살짜리 여동생은 한쪽 발을 잃고 어머니는 머리를 다친 것으로 현지 언론들이 이 가족의 슬픈 소식을 전했다.
 

범인은 압력밥솥을 이용한 사제폭탄을 이용해 못 등을 내부에 넣어 폭발시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연쇄폭발이 일어난 다음날 상원에 독극물인 리친이라는 물질에 양성반응을 한 편지가 배달되었다. 두 가지 사건에 연관성이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2001년 9.11테러를 연상시키기에는 충분하다. 9.11테러사건에서도 테러리즘이 발생한 몇 일 뒤에 언론사, 우체국, 의회 등에 탄저균이 담긴 우편물이 배달이 되어 5명이 사망하고 17명이 부상을 당했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이러한 비인간적인 행동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단지 테러행위자체가 알카에다와 같은 지능적인 단체가 하는 방식과는 달라서 배후에 거대한 테러조직이 연관되어 있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고 전해진다. 또 4월 15일이 미국에서는 세금을 내는 날인데 이것과 혹시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범행방식이 아마추어방식이고 특정한 목적으로 노출하면서 주체가 드러나지 않는 점과 보스톤 마라톤이 주기적으로 개최되고 어느 장소가 가장 민간인이 많이 밀집되어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는 점에서 미국정부에 불만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이유에서 나온 추측이다.
 

9.11테러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갑작스럽게 날아온 비행기가 건물을 들이받으면서 건물이 무너져 내리던 그 당시 상황이 담긴 화면에서는 처참함과 황망함에 어떤 표현도 나오지 않았다. 일상적인 아침을 시작하던 이들의 삶을 한 순간에 죽음의 세계로 이끌고 가버리고 그 가족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준 사건이 있고 나서 911일 뒤에 우리는 스페인에서 또 한번 테러리스트들의 잔악함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페인이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도왔다는 이유로 자행된 테러로 스페인의 정부가 바뀌었고 스페인은 이라크에서 철군했다. 그 뒤에 수많은 미군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죽었고 그 이상의 시민들이 같은 시민들에게 종교적 입장이 다르다는 이유로 테러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왜 도대체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것인가? 테러리즘의 역사는 길다.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조직적인 행동’으로서 테러리즘은 주로 프랑스 혁명기를 근원으로 한다. 자코뱅당의 공포정치(Reign of Terror)를 테러리즘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은 1793년부터 1794년까지의 프랑스 혁명기간에 사용된 ‘단두대의 정치’의 다른 말이자 자코뱅당이 반대파를 무차별적으로 처벌하던 정치를 지칭한다. 1798년에 프랑스에서 발간된 Dictionnaire of the Academie Francaise 의 증보판에는 테러리즘이 ‘조직적인 폭력의 사용’으로 인류역사상 처음 개념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대적 의미의 테러리즘으로 ‘조직화된 공포의 창출’로서 테러리즘이 프랑스혁명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의 증거이다.
  

하지만 테러리즘의 역사는 훨씬 길다. 시저가 로마를 지배하고 독재정치를 하자 이에 반대한 귀족과 공화주의자들에 의해서 BC 44년 3월 14일 시저는 만찬석상에서 암살되었는데 역사에 기록된 테러의 가장 빠른 사례이다. 로마시대의 황제들 역시 자신의 통치력을 강화하기 위해 테러리즘을 이용했다. 이 사례들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테러리즘을 사용한 예들이다.
 

반면에 종교적인 이유로 테러리즘이 자행되기도 했다. 가장 빠른 예로 AD 66부터 77년 사이에는 팔레스타인 종교집단들이 시카리(Sicarri)라는 테러리스트 단체를 결성하여 로마의 통치에 협력하는 유태인들을 공격하였다. 또한 십자군 전쟁시기에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정규군에 대항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암살자들을 불러서 기독교인들을 살해하기도 했다. 
  

이념이 문제가 된 경우들도 있다.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남부 극우주의자들이 KKK를 조직하여 노예제 해방을 주장하는 이들과 흑인들을 상대로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또한 일본의 적군파에 의한 테러리즘 역시 이념이 중심에 있었던 사례이다. 19세기후반에는 무정부주의가 팽배해지면서 이들이 국가조직에 대한 저항차원에서 테러리즘을 통해 자신들의 이념을 전파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삶에 대한 무기력, 염세주의 등이 이슈가 된 테러리즘도 있어왔다. 일본의 옴진리교사건이 대표적이다.
 

‘특정 위협으로부터 느끼는 극단적인 두려움의 근원’으로서 테러(terror)가 아니라 ‘조직적인 폭력 사용을 통한 위협의 동원’으로서 테러리즘(terrorism)은 차이가 있다. 두려움이 근원이 되는 것은 지진과 같은 자연현상이 될 수도 있다. 이 경우 테러는 인위적인 의도는 없다. 하지만 테러리즘은 인간의 의도와 관련되어 있다.
 

정치학이 다루는 사회현상은 인간의 목적을 전제로 한다. 그런 점에서 테러리즘 역시 인간이 가진 목적을 전제로 한다. 인간이 가진 목적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이익, 자유, 명예, 인정, 두려움 등이 인간이 가지고 싶거나 다른 한편으로 피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이러한 목적이 상대방의 목적과 다를 때 인간들은 갈등한다. 따라서 나의 목적과 상대의 목적이 불일치하는 현상에서 정치학이 개입한다. 목적의 불일치를 해결하지 않으면 너무나 위험한 존재인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 무엇을 할지 모른다. 오죽하면 토마스 홉스는 인간을 다른 인간에 대해 투쟁하는 야수로 묘사했겠는가!
 

결국 목적이 다른 이들이 모여서 살아가는 인간 공동체(국가가 아니라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세계사회까지를 포함하는 인간 공동체)에서 목적 간 불일치를 조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대체로 국가내부에서는 정부가 그 역할을 수행해준다. 하지만 문제는 정부가 조정해주지 못하는 국가보다 넓은 정치적 갈등의 경우(예를 들어 이슬람과 서양의 대립)나 국가내부의 결정구조에 대한 불인정(예를 들어 이라크에서 수니파가 시아파에게 저항하는 것)의 경우에는 조정이 되지 않는 것이다. 위에서 본 테러리즘의 몇 가지 유형들은 조정되기 어려운 정치적 목적과 종교적 교의의 불일치 그리고 이념적 계몽주의 간 충돌의 문제들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정치적 목적이 불일치하면 인간은 권력을 동원해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다. 따라서 세력이 강한 그룹은 수(number)로 뭉쳐 자신들의 세를 과시하고 결정권을 쥐고자 한다. 힘이 강한 국가공동체는 다른 국가공동체에게 무력과 경제력을 이용해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다. 2013년 중국이 4월 15일 북한의 태양절에 매년 보내던 식량을 안 보낸 것은 중국자신의 목적을 강요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면 힘이 약하고 수가 부족한 세력은 어떻게 하는가? 이때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그 중 테러리즘은 약한 세력이 구사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부분을 뚫고 들어간다. 인간에게 가장 취약한 공포심의 영역을 공격하는 것이다. 힘이 세고 부유하고 수가 많아도 조직이 아닌 한 사람의 인간으로 돌아오면 모두가 동일하게 느끼는 공포가 있다. 테러리즘은 조직화된 인간을 가장 밑바닥에 있는 공포심인 ‘급작스러운 죽음’을 느끼게 하여 조직 속에서 인간을 불리해내서 개인화한다. 테러에 노출된 것은 집단으로서 내가 아니라 불특정하게 죽을 수 있는 ‘나(I)’에 있다. 가장 근저에 깔린 계획되지 않은 죽음에 의한 억울함을 건드리면서 테러리스트는 인간들의 조직을 심리적으로 무너뜨린다. 개인이 직접 공포와 마주하게 함으로서 세력이나 권력이나 수를 의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테러리즘이 공포를 동원한다면 공포심을 유발하는 가장 좋은 방식은 충격을 주는 것이다. 충격은 일상적인 생활의 원칙이 깨질 때 나온다. 전쟁터에서는 사망할 수 있고 다칠 수 있다는 기대가 있다. 하지만 마라톤 결승점에서 달려오는 아빠를 응원하는 그 생활의 일상성속에는 전쟁터에서의 기대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충격은 ‘놀람 혹은 기습(surprise)’에 있는 것이다.
 

인간 공동체에서 테러를 박멸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테러리즘이 힘의 비대칭상황에서 사용하는 전략적인 선택이라면 말이다. 국제정치학자 폴(T. V. Paul)이 Balanc of Power라는 책에서 서술한 것처럼 테러리즘이 약자가 선택한 합리적인 전략이라면 힘의 불균형이 존재하는 한 테러리즘은 사라지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가 손을 놓고, 일상성이 붕괴되고 조직화된 인간집단이 공포심으로 가득 찬 개인으로 추락하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테러의 원인은 다양하겠지만 해법은 간단하다. 정치적 목적의 타협을 위해 테러리스트들을 설득하거나 아니면 테러리즘이라는 방식이 테러리스트들의 목적을 달성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공포심에 담대함으로 맞서고, 개인화를 극복하여 결연한 ‘우리(We)’라는 공동체가 호락호락 붕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테러리즘에 대처하는 방법이다. 보스턴에서 사망한 이들과 부상당한 이들에게 슬픔을 전하면서 ‘우리(We)’는 이 시대의 이러한 비극을 막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지금 ‘우리(We)’가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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