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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의 정치학-한국의 미래를 어떻게 봅니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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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의 정치학-한국의 미래를 어떻게 봅니까? (3)
  • 법률저널
  • 승인 2013.01.25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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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민주주의, 휴머니티

 

신희섭 베리타스 법학원 

 

지난 한 주 동안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헌법재판소장 후보자로 지명된 이동흡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있었다. 이명박 정부 내내 발목을 잡았던 공직후보자의 비리 문제가 다시 불거져 나오면서 임기 말까지 일관성있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한편에서는 22조나 들어간 4대강 사업에 감사원이 ‘총체적부실’이 있다고 지적했다. 엄청난 예산을 4년간 쏟아 부었는데 강의 환경은 나빠졌고 원기획인 물부족과 물관리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부 측에서는 4대강 사업에 문제가 없다고 반박하지만 환경단체와 전문가들은 이미 예견된 결과였다고 하면서 한편으로 감사원의 뒤늦은 정부에 대한 비판을 씁쓸하게 보고 있다. 또 다른 이슈로 지난 대선에서 고개를 들었던 택시법이 대통령에 의해 부결되었다. 지면을 차지하는 여러 가지 안좋은 일들에도 불구하고 늘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자기 자리에서 그저 묵묵히 잘 버티면서 보낸 한 주이다. 언론의 호들갑과 넘쳐나는 것처럼 보이는 몰상식한 일들 속에서도 시민들의 묵묵하게 보내는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일들이 더 많이 하루를 채우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미래를 살펴보기 위한 노력은 이런 이중적인 모습 속에서 한국 사회를 좀 더 냉철하게 보기 위한 것이다. 일상적인 삶에서 놓치게 되는 것들. 좀 더 포괄적인 사고를 통해서 우리가 명확하게 해야 하는 비전들. 열심히 살고 있지만 그 보답이 적은 이유가 혹시 사회의 구조적 문제는 아닌지 아니면 구조적인 이유를 들지만 사실은 몇 몇 정책의 운영적인 문제에 기인하는 것은 아닌지. 이런 문제들을 살펴보는 것에 의미를 둘 수 있겠다.
 

지난 시간에 이어 다룰 책 『세계의 석학들, 한국의 미래를 말하다』에 대한 일상적인 의미 부여는 그렇다. 너무 큰 주제들을 다루지만 그 속에는 저자인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가 쓴 프롤로그의 제목처럼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서 한국의 진솔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이 책이 다루는 두 번째 주제는 한국 언론의 문제이며 이것은 진보적 지식인 노암 촘스키교수와 로버트 맥체스니교수가 다루고 있다. 나꼼수를 통해서 정치적 이슈를 상업적인 목적이 아닌 차원에서 다루는 것으로 한국 언론을 출발하는 2장에서는 언론의 사회적 기능으로서 사회적 앰뷸런스의 기능을 다룬다. 대안언론으로서 주류언론과는 다른 차별성을 통해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의 기능에도 불구하고 맥체스니 교수는 한국의 나꼼수와 미국의 몇 가지 정치적 풍자쇼가는 코미디일 뿐 저널리즘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나꼼수가 가지는 기능을 과도하게 비난하는 것도 문제지만 과도하게 부풀리는 것도 문제라는 점에 대해 한국 사회가 좀 더 냉정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은 필자를 한국인으로서 조금 부끄럽게 만들기도 했다.
  

우리가 무엇을 선호하는지 혹은 선호하지 않는지는 정의의 문제가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것을 어떤 방식으로 가공해서 처리하면서 희극으로 만들지 비극으로 만들지 역시 정의의 문제는 아니다. 그저 싫은 것은 싫은 것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감정적으로 싫은 것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러한 선호의 문제가 정의의 문제로 눈 깜빡할 사이에 변모한다. “싫다 그래서 부정의하다”라는 공식들이 너무나 순진하게 유포된다. 그러나 맥체스니 교수는 다른 한편으로 한국의 방송사들에서 전개되는 편집 구성권을 얻기 위한 노동운동은 임금과 같은 개인적 이해관계를 넘어선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한다. 언론이 사회에서 화재경보기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작은 불에도 쉽게 점화되어 불에 타 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언론인들이 자신들의 사회적 요구를 드러내기 위한 노력은 의미있다. 그런데 그들의 주장과 반대편의 주장이 좀 더 객관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다른 방안은 과연 없을까 하는 생각은 든다.
 

이 책의 3장은 대통령의 자격을 이야기 한다. 한국정치에서 나타나는 아웃사이더 중심의 정치에 대해서 프랜시스 후쿠야마교수는 아웃사이더를 지지하는 수요 측을 바라본다. 즉 유권자들이 가진 기존 제도에 대한 실망과 기성정치제도가 가진 경제구조나 이해집단에 대한 빚을 지지 않는 새로운 인물이라는 점이 2002년의 노무현과 2007년의 이명박이라는 후보자를 일약 스타로 만들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레그 브레진스키교수 역시 정당과 정치에 대한 좌절감이 한국과 미국에서 정치문외한을 지지하게 만든다고 분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들의 결과는 모두 참담하다. 가장 유명한 사례 중 하나인 “터미네이터” 아놀드 슈워제너거의 경우는 정치인으로서 결국 직접 인민들에게 호소하는 정치를 택했고 이것은 개인적으로도 실패를 가져왔고 정치제도로 연결되지도 못하여 하나의 정치적 에피소드로 끝나고 말았다. 그는 유명한 ‘영화인’이 정치를 한 사람이 되었지 유명한 ‘정치인’이 되지는 못하였다.
 

이 3장의 주제는 한국 정치에 큰 함의가 있다. 아웃사이더 혹은 외부인들이 진입한 정치는 좋아졌는가? 미국 사례들을 보았을 때 결과는 그렇지 않다. 문제는 실패의 원인이 개인에게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책의 저자인 후쿠야마는 실패의 원인을 비전 제시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이유로 개인적 측면의 원인에 집중한다. 시오도르 루즈벨트와 플랭클린 루즈벨트와 로널드 레이건을 가장 위대한 미국의 3대 대통령으로 지목하면서 후쿠야마는 이들의 리더십 특히 비전을 제시하고 노변담화와 같은 방식을 통해서 설득을 해간 방식에 주목한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이러한 개인적 능력이 다양한 사회적 요구를 수용하고 비전을 구체화하여 정책으로 만들어 내는 것에는 정당이라는 제도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런 관점에서 한국의 대통령선거 구조를 보자. 새로운 사람에 대한 요구와 환희는 결국 사람에 대한 지배방식의 이해를 넘어서지 못한다. 제도는 수구적이며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하고 정당을 최소화하면서 지도자의 리더십을 극대화하려는 한국정치의 움직임은 정치자체에 대한 무지에 기인하는 것이다. 어떻게 한 개인이 100만 명이 넘는 조직을 갖춘 정부조직을 관리하면서 4천만 명이 넘는 유권자의 의사에 반응할 수 있는가? 리더십이 무엇이든지 해줄 것이라는 환상은 정치를 실제로 개인화하고 이속에서 이권을 가져보려는 악의적인 수사이거나 정치를 인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유토피아적 망상일 가능성이 높다.
  

리더십을 갖춘다는 것은 제도를 작동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제도를 운영하는 이들을 관리하고 조직화하고 이들에게 방향을 제시하여 제도를 개편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리더십은 제도와의 관계에 있어서 동어반복이다. 제도를 작동시킬 수 없다면 리더십이 없는 것이고 그 반대는 리더십이 있는 것이다. 고로 이러한 정의는 사회과학적으로는 의미가 없을지 모르지만 이념적인 차원에서는 소망에 가까운 것이고 선호라고 불러도 좋은 것이다.   
 

한국정치에서 정당을 약화시키려는 노력은 정치적 문제의 근원을 한국 정당의 취약성에서 찾았다. 제도화가 부족하고 인적인 집단들로 만들어지며 특별한 정책을 만들지 못하고 국회에서 싸움만 한다는 것이 정당에 대한 대표적인 비판들이었다. 민주화를 1987년으로 잡았을 때 정당의 제도화가 부족한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사이에 IMF위기를 거쳤고 정당의 각 보스들이 떠났고 정보화로 대표되는 사회적 변화가 빨라서 정당이 이를 반영하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정당이 사회 이념의 수렴에 따라 중도노선으로 수렴되었기 때문에 정당은 자기 진영지지자를 유지하고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차이가 없는 정책으로 싸워야 한다. 국회에서 싸우지 않으면 정당간 정책적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정당에서 인적인 구성이 각 파별로 구분되면서 각자 내부에서 노선이 달라지는 것은 사회적 이치에 따르면 타당하다.
  

이 모든 원인들에 비추어 정당은 현대 한국 정치를 풀어가기에 부족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할 것은 시간이다. 이제 국회의 임기는 1988년의 13대 총선에서 19대를 지나고 있다. 1987년의 12대 대선은 18대 대선을 거쳤다. 국회와 대통령이 민주화이후 이제 성년기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정치개혁은 정당의 미숙함으로 인해 정당을 배제하자는 쪽이다. 논리는 이렇다. “아직 성숙하지 못했어 그래서 죽이는 것이 낳겠어!!”
 

그동안 미국식의 약한 정당을 기반으로 하는 원내정당화를 중심으로 한국의 정치개혁이 이루어져 왔다. 그런데 정치개혁의 결과 리더십이 잘 작동하게 되었는가? 결과는 오히려 그 반대이다. 지도자들에게는 과도한 ‘국내정치적’ 부담과 ‘정책적’ 부담을 주면서 ‘외교적’ 부담까지 부과하게 되었고 이들 지도자를 지원할 시스템은 미약하다.
 

정당을 왜 만들었을까를 생각해보자. 이유는 간단하다. 지도자 혼자 정치를 하기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정당을 부정하면서 리더십을 강조하는 한국의 정치현실은 도대체 정치에서 무엇을 기대하는 것인지 되묻게 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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