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윤창중 수석대변인 임명과 사람의 이목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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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윤창중 수석대변인 임명과 사람의 이목구비
  • 법률저널
  • 승인 2012.12.28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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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학장 / 변호사 / 시인

 

사람의 얼굴에는 눈, 코, 귀, 입이 있다. 그 중 눈과 입은 제 스스로 살아 죄를 짓기도 하고 복을 빌기도 한다. 능동적이다. 눈과 입은 저절로 말을 한다. 소리로 말하는 입, 빛으로 말하는 눈은 축복을 통해 남에게 기쁨을 주기도 하고, 저주를 통해 남에게 고통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눈과 입은 그 얼굴의 주인을 거슬리지 않는다. 눈과 입은 얼굴의 내적 표출이다. 가끔가다 종전의 모습과 다른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대오각성하여 사람이 완전히 변했거나, 아니면 거짓말을 하기 위해 자신을 속이고 이웃을 속이는 경우이다. 사람은 그 사람의 말로 결정되어지는 까닭에 나는 오늘 그 사람의 말을 믿지 않는다. 오직 그 사람의 어제의 말을 믿을 뿐이다. 어제는 이미 오늘로 그 진실이 폭로되었고, 확정되었기 때문에 어제 그 사람이 한 말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거짓으로 판명되면 거짓으로, 진실로 판명되면 진실로 믿는 것이다. 나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일단 알지 못하는 사람의 말은 대체로 믿는다. 아직 그 사람으로부터 속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를 속인 전력이 있는 사람의 말은 어제 그 사람이 한 말만 믿을 뿐 오늘 그 사람이 하는 말은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제와 오늘 사이에 그에게 대오각성할 일이 일어난 적이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반면에 코와 귀는 제 스스로 죄를 짓지 않는다. 이 세상의 그 험한 말을 다 듣고, 이 세상의 썩은 냄새를 다 맡지만, 제 스스로 죄를 짓지 못한다. 수동적이다. 기껏해야 썩은 냄새를 킁킁거리거나 악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정보를 수집할지는 모르지만, 그래서 뇌에 전달할 지언정 스스로 악한 일을 공개적으로 범하지 못한다. 코와 귀는 의도하지 않더라도 들려오는 소리와 느껴져 오는 냄새를 피할 수 없다. 자율적 통제가 되지 않는 기관인 것이다. 들리면 들어야 하고, 느껴져 오면 맡아야 한다. 그래서 본능에 충실하고, 코와 귀의 반응을 따라 움직이면 실패가 적다. 그렇지만 입과 눈은 자율적 통제가 가능하기에 통제를 잘못했다가는 스스로 봉변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어찌하여 신은 한 사람의 얼굴에 능동적인 입과 눈을, 수동적인 코와 귀를 함께 배치해 놓았을까? 내가 곰곰 생각에 잠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천 냥 빚도 한 마디 말로 갚는다.”고 했다. 조선 영조 때의 학자 김천택이 편찬한 시조집 청구영언에는 “말하기 좋다 하고 남의 말을 말을 것이/남의 말 내 하면 남도 내 말 하는 것이/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라는 작자 미상의 시조가 수록되어 있다. 앞의 글은 말의 긍정적 의미를 교훈하는 말이고, 뒤의 말은 말의 부정적 의미를 가르치는 말이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 속담에 “세 치 혓바닥이 몸을 베는 칼”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말을 잘못하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는 말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말이다. 이처럼 말은 그 사람을 떠나서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그 사람의 인격이자, 그 사람 자체이다. 중국 五代시절 열한 명의 천자를 섬기며 백성을 보살폈다는 풍도(馮道)라는 재상은 난세에 살아남기 위해서 말의 위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았다. 그는 “舌是斬身刀(설시참신도)- 혀는 제 몸을 베는 칼”이라고 갈파하였다. 평소 언행을 얼마나 조심해야 하는지, 사소한 말실수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극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재상 풍도가 중국 당 멸망 후 송 건국 직전의 혼란스러운 난세에서 열한 명의 천자를 별 탈 없이 모실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나쁘게 말하면 그가 시류에 따라 아첨을 잘 한 처세술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그것도 한 둘의 천자일 때이지 열한 명의 천자를 그렇게 아첨으로 일관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것은 짐작컨대, 그가 진실로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 다시 말해 인품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겠는가 미루어 볼 뿐이다.


18대 대통령선거가 끝난 지 열흘이 되어간다. 한쪽은 승리에 도취해 있고, 다른 한쪽은 망연자실한 상태이다. 51.6%대 48.1%, 불과 3% 남짓의 승패로 한쪽은 전부를 가졌고, 한쪽은 하나도 갖지 못하였다. 승자독식의 원리에 의하면 승자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승자독식의 원칙을 강조하며 모든 것을 마음대로 행사한들 무어라 말할 수는 없지만,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박근혜 당선자가 선거 기간 동안 내내 부르짖었던 100% 국민통합의 대정신의 실천이다. 승자는 겸손해야 한다. 승자가 교만해지면 그때부터 비극은 시작된다. 항시 비극은 환희의 첫걸음에서부터 잉태됨을 명심해야 한다. 그것이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이다.


대통령 선거개표가 종료되어 박근혜 당선자가 확정되었을 때 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 중 몇몇은 흐느껴 울었다. 그들이 눈물 속에 내뱉는 말은 “아니, 대한민국이 이럴 수가 있는가? 정의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독재자의 딸이 다시 선거를 통해 대통령으로 합법적으로 당선되다니 수치스럽다.”라는 내용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들은 대부분 유신시대를 겪으며 민주주의를 위해 일생을 바쳤던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눈앞의 빵 보다는 영원한 가치인 자유”를 더 중요시하며 살아왔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눈물은 “어찌 빵 한 조각에 민주와 정의, 그리고 자유를 팔 수 있는 나라가 되었는가?”라는 울부짖음 속에 들려오는 절규였다. 아니나 다를까? 박근혜 당선자가 환하게 웃는 날, 두 명의 부당해고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들의 죽음 소식을 접하면서 문득 나는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희망”이라는 보이지 않는 생명의 끈 때문이었다고 고백한 어느 생존자의 절규가 떠올랐다. 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그들이 유서에서 밝힌 바와 같이 자신들을 돌보아줄, 그 동한 고통 받아 온 자신들에게 동감해 줄 그 무언가의 희망이 사라져버렸음을 절감하는 데에서 오는 절망 때문이었음을 깨닫는다.


인터넷상에 “노인들의 무임승차폐지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운동을 전개하는 젊은이들의 편에 서고 싶지도 않고 서서도 되지 않는다. 노인은 노인대로 존경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기둥이었음을 부정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많은 젊은이들이 분노하는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2030대의 젊은이들이 5060으로 상징되는 기성세대에 대한 분노는 이번 대선과정을 통해 세대 간의 극렬한 투쟁양상으로 현실화되고 있다. 젊은 세대는 자신들이 미래세력이고, 노인세대를 과거세대로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젊은이들은 이번 선거를 과거세대가 미래세대의 앞길을 막았다고 봄음으로써 위와 같은 극단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과거세대라고 지칭되는 세력이 지금 그랬듯이 앞으로의 대한민국을 결정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경제적 힘을 가졌고 기존에 형성된 권력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7-80년대의 산아제한정책으로 빚어진 인구감소현상으로 유권자 투표수에서도 젊은 세대에 앞서다 보니, 앞으로 대한민국의 미래는 노인세대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모순을 잉태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기에 WTO체제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 가진 자의 독주체제가 당연시되는 구체제를 개혁하지 않고서는 젊은 세대에게 미래가 없다는, 그래서 취업도 제대로 할 수 없고, 취업이 되더라도 비정규직이나 88만원 세대로 고착화될 수밖에 없다는, 그래서 취업, 결혼, 출산을 포기한 3포세대의 고착화현상이 앞으로 장기화될 전망이다.


젊은이들은 이번 선거를 이러한 3포세대의 비극을 극복할 수 있는 터닝포인트로 삼으려고 했던 것인데, 그것이 50ㆍ60세대에 의해 철저하게 좌절되어 버리고 나니, 허탈 정도를 벗어나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버린 것이다. 내가 사용하고 싶지 않은 단어, 소위 멘붕상태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들은 지금 분노하고 있다. 그러기에 박근혜 당선자는 이들의 분노를 이해하고, 그 분노를 잠재울 수 있는 “정신적 영혼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해야 할 시대적 책임이 크다. 그런데 그녀가 제일 먼저 한 인사가 “윤창중 수석대변인 임명”이었으니, 젊은이들이 다시 한 번 멘붕상태에 빠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개선될 수 없는 박근혜 당선자의 한계를 보게 되고,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윤창중, 그는 정치권과 언론계를 오가는 줄타기를 계속하였다. 그러면서 문재인 후보를 향해 종북세력이라고 지칭했고, 노무현 대통령 서거 시 애도하는 국민을 향해 “광기에 찬 황위병이 벌인 거리의 환각파티”라는 극언을 퍼부었다.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를 종북주의자로 일방적으로 매도하며, 야권을 지지하는 젊은이들을 향해 386세대를 닮은 좌파라며 공격했다. 철저하게 국민을 편가르기하여 새누리당을 지지하면 우파, 민주통합당을 지지하면 좌라 내지 종북주의라는 색깔 덧입히기에 혈안이 되었던 자이다. 반대편의 국민을 향해 “정치적 창녀, 지식의 탈을 쓴 더러운 강아지, 매국노”라는 등 전혀 후안무치한 편파성을 드러내 온 그가 100%대통합국민시대에 맞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상식적인 사람이면 누구나 다 판단할 수 있다. 오죽하면 같은 당인 새누리당 정우택 최고위원조차 대통합에 맞지 않는 인선이라고 쓴소리를 하고, 인명진 전 윤리위원장조차 이해할 수 없는 인선이라고 비판하고 나섰겠는가? 윤창중 본인도 임명 하루 전까지만 해도 어떤 자리가 와도 가지 않겠다고 방송에서 공언해 놓고, 그 다음 날 첫 번째 인사를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느냐며 박근혜 정권에 들어가 성공한 정권을 만드는 게 자신의 책무라며 곧바로 말을 바꾸는 그의 후안무치함이 안쓰럽다.


박근혜 당선자는 분열주의자로 평가되는 윤창중에 대한 수석대변인 임명을 철회하는 것이 옳다. 첫 번째 인사에 딴지를 거는 듯한 야당 및 국민 여론에 질 수 없다는 오기인사를 강행해서는 안 된다. 100% 국민통합을 이루려면 차라리 정부에 비판적이던 정신 올곧은 야당 성향의 언론인들도 많지 않은가? 수석부대변인은 박근혜 당선자의 입이다. 당선자의 입은 곧 당선자의 얼굴이다. 당선자의 얼굴은 당선자 자신이고, 곧 모든 국민이 바라보는 박근혜 당선자 본인인 것이다. 이제는 대통령 당선자가 되었으니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했으면 한다. 대통령 당선, 다 가진 것 아닌가? 아무리 빼내주어도 가진 자가 주는 것이고, 이는 결국 국민대통합으로 연결되는 시대정신의 구체적 실현인 것이다. 48%의 국민을 좌파, 종북주의자로 매도하는 윤창중 같은 이를 수석대변인으로 인정하여 반대자들을 적으로 돌릴 것이 아니라 그들을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을 자신의 입으로 선임하기를 바란다. 주위를 좀 넓게 둘러보라, 밀실에서가 아니라. 그러면 의외로 많은 인재들이 있음을,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온건하게 판단하며, 결코 방향키의 조종대를 함부로 놓지 아니하는 견실한 애국자가 많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으면 좋겠다. 찾다찾다 없으면 나에게 부탁하기 바란다. 내가 찾다 없으면 나라도 하겠다. 내가 해도 윤창중 보다는 훨씬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첫 인선을 보고, 너무 어안이 벙벙해져서, 그냥 웃자고 해보는 소리다. 전화 속에서 눈물 흘리는 사람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 오죽하면 상징적으로 노임무임승차폐지를 주장하며 골목길 막힌 벽 앞에 서서 통곡하는 젊은이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대한민국이 밝아지지 않겠는가? 찾다찾다 없으면 내게 부탁하시기 바란다. 아마 그렇게 생각하는 국민들이 참으로 많을 것이다. 차라리 나에게 부탁하세요. 대한민국에 “나”라는 “국민”들이 아주 많이 있음을 인식했으면 한다. 참 답답한 일이다. 훌륭한 대통령이 되셔야 할 것 아닌가? 이제 착한 공주, 모든 것을 남이 다 알아서 해 주는 착한 공주 역을 마치고, 대통령이 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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