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섭의 정치학-좋은 삶과 공익과 사익의 문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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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의 정치학-좋은 삶과 공익과 사익의 문제 (1)
  • 법률저널
  • 승인 2012.12.28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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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민주주의, 휴머니티

 

신희섭 베리타스 법학원 

 

다음 글은 최근에 지인으로부터 받은 좋은 글이다.

 

 <아름다운 인연>

 

부유한 귀족의 아들이
시골에 갔다가 수영을 하려고
호수에 뛰어 들었습니다.

그러나 발에 쥐가 나서
수영은 커녕...
물에 빠져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귀족의 아들은 살려달라고 소리쳤고,
그 소리를 들은 한 농부의 아들이
그를 구해주었습니다.

귀족의 아들은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그 시골 소년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둘은 서로 편지를 주고 받으며 우정을 키웠습니다.

어느덧 13살이 된 시골소년이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귀족의 아들이 물었습니다.
 
“넌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의사가 되고 싶어,
하지만 우리 집은 가난하고
아이들도 아홉 명이나 있어서
집안 일을 도와야 해... “

귀족의 아들은 가난한 시골소년을 돕기로 결심하고
아버지를 졸라 그를 런던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결국 그 시골 소년은 런던의 의과대학에 
다니게 되었고
그 후 포도당 구균이라는 세균을 연구하여
'페니실린'이라는 기적의 약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1945년 노벨의학상을 받은
“알렉산드 플레밍”입니다.

그의 학업을 도운 귀족 소년은
정치가로 뛰어난 재능을 보이며
26세의 어린 나이에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 정치가가
나라의 존망이 달린 전쟁 중에
폐렴에 걸려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폐렴은 불치병에 가까운
무서운 질병이었습니다.
그러나“알렉산드 플레밍”이 만든
‘페니실린'이 급송되어
그의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시골 소년이 두 번이나
생명을 구해준 이 귀족 소년은
다름 아닌 민주주의를 굳게 지킨
“윈스턴 처어칠”입니다.

어릴 때 우연한 기회로 맺은 우정이
평생동안 계속 되면서
이들의 삶에 빛과 생명을 주었던 것입니다.
 
만약 내가 다른 이의 마음속에
새로운 세계를 열어줄 수 있다면 그에게 있어
나의 삶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후일 영국 수상이 된
부유한 귀족의 아들 “윈스턴 처어칠”이
어린 시절 시골에서 우연히 알게 된
가난한 농부의 아들을 무시했더라면
시골 소년은 의사가 되어 ‘페니실린’을
만들 수 없었을 테고
처어칠은 폐렴으로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귀족 소년과 시골 소년의 깊은 우정으로
농부의 아들은 의사가 되어
노벨 의학상을 받을 수 있었고
귀족 소년은 전쟁 중에
나라를 구하고 민주주의를 지킨
수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 인연도 이렇게 오래도록
좋은 인연으로 지속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오늘의 글-

 

좋은 삶이란?

위의 글은 플레밍과 처칠의 일화를 보여준다. 이 글에서 플레밍은 처칠의 목숨을 두 번 구한다. 한 번의 직접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구했고 다른 한 번의 자신의 의학재능을 통해서 구한다. 처칠은 두 번이나 플레밍의 도움을 받았다. 한 번은 직접적으로 자신만이 받았고 다른 한번은 다른 이들과 함께 받았다.
  

여기서 이 일화는 우리에게 좋은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좋은(good)’ 삶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이 주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주제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삶이란 ‘행복(eudaimonia)’을 추구하는 삶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인간의 목적(telos)을 추구하는 삶이 좋은 삶이라고 했다. 그리고 인간의 목적이란 다른 데 있지 않고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것이 경제적으로 성공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신적 행복인지에 대해서는 후대의 학자들 마다 생각이 조금 다르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삶은 행복(happiness)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았다.
 

위의 일화는 아리스토텔레스적 행복을 잘 보여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인이 가진 시민적 덕성이 다른 시민들에 의해서 좋은 평가를 받을 때 좋은 삶을 산다고 보았다. 즉 시민들간의 유대의식(friendship)이 있어서 시민으로서 공동체의 삶에 관여하고 공동체의 공공선을 추구하는데 앞장서고 시민으로서의 자질을 인정받는 삶이야 말로 인간이 태어나서 살아가는 근본적인 목적이 된다고 보았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노블리스 오블레주에 해당하는 것이다.
  

플레밍이 처칠을 처음 도운 것이 계기가 되어 처칠은 플레밍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도왔다. 그런 도움은 플레밍이 의사가 되어 백신 개발을 함으로서 나중에 다시 처칠의 생명을 구할 뿐 아니라 자신 외에 다른 사람들의 삶도 구했다.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의 목숨도 폐렴으로부터 지킬 수 있게 해주었다. 이 과정에서 우정을 배울 뿐 아니라 공동체에 대한 기여를 배운다. 
  

이 사례에서는 공동체에 대해 의도적으로 의사가 되기 위해서 플레밍을 돕거나 처칠이 영국을 구할 것을 예지하여 처칠을 돕는 것은 아니다. 그저 친구로서 돕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도움으로서 다른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성취하는 것과는 다른 만족감을 준다. ‘자애심(pity)’ 즉 다른 이에 대한 애정을 느끼고 그러한 감정에 충실할 수 있게 해준다. 이것이 마음속에 애틋함으로 나타나는 지 측은함으로 나타나는지 아니면 타인이 가진 재능에 대한 자부심으로 나타나는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이 무엇인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에서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연민이나 동정심(compassion)을 넘어서는 것이다. 동정과 연민은 다른 이의 상황을 보고 안타까워하고 감정을 이입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동정은 잘못하면 다른 이와 나와의 관계를 수직적으로 구분한다. 즉 나는 동정할 수 있는 상황과 지위에 있고 타자는 동정받는 대상의 지위에 있는 것이다. 사회의 상층부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잘못하면 사회하층부의 문제들을 보면서 동정할 경우 이것은 자신의 지위에 대한 만족감과 권력욕구의 또 다른 이름이 될 수 있다. 아예 공감대를 가지지 않고 사는 것보다는 사회화가 조금 더 되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일 수 있다.   
  

하지만 윈스턴 처칠과 프레밍의 일화에서 찾아내고 싶은 것은 이러한 연민의식을 뛰어넘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하는 것에서 출발한 타인에 대한 배려. 보상에서 시작했지만 이후 보상이라는 이해관계를 떠나는 것은 ‘연대의식’에서 가능한 것이다. 같은 사회를 살아간다는 공존의 의식과 타인의 삶에 대한 긍정과 타인의 삶과 나의 삶을 이어주는 ‘연대의식’이 두 사람 사이를 발전시켰다. 따라서 좋은 삶이란 나에서 출발하고 타자와의 관계속에서 만들어 질 수 있는 것이다. 나에게만 좋은 삶이 아니라 나에게 좋지만 타자와의 관계속에서도 좋은 삶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나보다 다른 사람을 앞세우는 이타주의와 다르다. 나와 타자를 한 공동체구성원이자 연대적 존재로 상정하여 나에게 ‘좋은 것(선)’이 타자에게도 ‘좋은 것(선)’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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