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섭의 정치학-『정치의 발견』에 대한 짧은 생각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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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의 정치학-『정치의 발견』에 대한 짧은 생각 3
  • 법률저널
  • 승인 2012.10.26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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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민주주의, 휴머니티

 

신희섭 베리타스 법학원 

 

『정치의 발견』에 대한 짧은 생각 3

 

한국에서 정치를 이해하는 많은 사람들은 ‘정치=도덕’의 공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도덕적 기준을 통해서 정치를 평가하고자 한다. 이런 입장에서 진보와 보수로 대립된 한국정치운영은 분열자체로만 보아도 혐오스러운 것이다. 게다가 이런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정치인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런 입장에서 정치는 부정되어야 할 것이거나 공동체를 위해서 필요는 하지만 자신은 개입되고 싶지 않은 것이 된다. 그래서 누군가 정치에 대해서 진지하게 이야기라도 하려고 하면 “왜 정치하게?”라며 묻는다.
 

정치는 공동체를 위해서 사회공동체가 가야할 올바른 방향을 정하고 이 방향을 행해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이 사회적 합의를 거부하는 자나 사회적 합의를 무시하는 자들을 강제하기 위한 권력행사가 필요하다. 게다가 사회적 합의 자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가치를 사회가 더 중시하는지에 대한 의사확인 작업이 필요하다. 그런데 사회구성원들은 이러한 거대한 작업보다는 자신과 관련된 현실적인 이해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도덕보다도 자신의 주머니에 한 푼이 더 중요할 때가 있는가 하면 생계가 걸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시급하기도 하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구성원들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면서도 장기적으로 공동체가 가야할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정치를 작동가능한 현실적인 제도로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제도는 우리 “인간이 만든 고안물로 안정적으로 작동할 것이라는 기대가 형성된 것”을 의미한다. 개인적으로는 결혼이라는 제도에서부터 국가들 간에 합의에 의해 구축되는 국제제도들까지 제도는 다양하게 존재한다. 그리고 정치를 제도로 이해할 때 비로써 현대정치학으로 넘어올 수 있다.
 

현대 정치학은 제도의 정치학이다. 제도를 통해서 작동가능한 정치제도들의 조합을 구축하고 민주주의를 작동시키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도의 정치는 인간에 대한 불신에서 출발한다. 인간이 가진 사악함과 욕망을 인정할 때 그것은 거부될 것이 아니고 그러한 욕망과 이기심을 가진 사람들이 사회공동체수준에서 다른 구성원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하기 위한 현실적인 규칙이 중요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제도로서 정치를 이해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솔직한 인정을 바탕으로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민주주의와 정치에 대한 이해를 제도적 관점에서 하는 것이 일차원적이고 도덕적 기준을 통해서 정치를 이해하는 것이 좀 더 고차원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치에 대한 과도한 기대를 반영할 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지나친 기대를 반영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할 수도 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생계의 문제거나 자신의 자유의 문제로 이에 대한 변명을 하면서 자신의 행동은 용서하지만 다른 이의 행동은 용서하지 못한다.
  

이러한 태도는 자신에 대한 이중적 기준이라는 도덕적 문제와 함께 정치에 대한 탈정치화라는 문제를 가져오게 한다. 정치에 대한 거부나 회의감은 결국 작동하는 현실 정치로부터 유권자들을 몰아내게 만든다. 그리고 정치에 대한 회의감에 찬 이들이 나간 빈자리는 결국 사적인 이익을 극대화하고 권력을 사인화하려는 이들에 의해서 채워진다. 왜냐하면 이들은 원래 정치에 도덕을 요구할 생각도 없었고 정치를 도덕화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정치를 도덕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현실 정치를 비도덕적인 이들의 수중에 넘길 가능성을 높인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악순환을 거치면서 점차 구조화된다.
 

민주주의를 제도와 절차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렇게 구축된 민주주의 제도들을 좀 더 도덕적일 수 있게 만드는 인간들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를 제도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은 무엇이 좋은가?
 

제도와 절차로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것의 장점은 현실적이고 작동 가능한 민주주의를 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다. 이념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만질 수 있는 것으로 민주주의와 정치를 만든다. 이제 민주주의는 제도들의 조합물이 된다. 그리고 다양한 제도들로 구성된 민주주의는 측정 가능한 것이 된다. 즉 정당과 선거 등의 제도가 얼마나 민주주의를 반영하기 좋은지를 평가하고 개선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준다. 이로서 민주주의는 도덕적으로 부정될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몇 가지 문제점을 가지는 것이 되며 그 부분들에 대한 보완지점을 찾아야 하는 존재가 된다.
 

제도적인 이해의 핵심에는 정당이 있다. 정당을 통해서 민주주의를 구축해야 한다고 보는 입장에 샤츠슈나이더가 있다. 그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는 획기적이다. 그는 민주주의에서 사회적 갈등이 필수적이라고 보며 이 갈등을 조절해가는 장치로서 민주주의를 이해한다. 이것은 ‘민주(民主)’라고 하는 권력의 근원이 무엇인가라는 민주주의에 대한 규범적인 이해와 다른 것이다. 인민은 다양한 가치를 가지며 다양한 가치를 가진 이들이 싸우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공화주의처럼 가치의 단일화와 화합하는 사회의 이상으로 평가해서는 안된다.
  

그의 입장을 조금만 더 살펴보자. 샤츠슈나이더에 따르면 민주주의의 핵심은 사회적 갈등의 표출에 있다. 갈등은 민주주의의 엔진이다. 사회적 갈등이 어떻게 집합되어 나타나는가가 민주주의를 결정한다. 다원적인 근대사회는 다양한 갈등을 내포하고 있다.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사회적 가치 역시 복잡해 졌다. 과거 농경사회의 목표는 안정적인 기후조건에서 농작물이 만들어 지고 제값을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산업화를 거치면서 사회는 농민과 노동자와 자본가등으로 분화되었다. 노동자나 자본가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안정적인 물가를 위해서 농작물가격 상승을 통한 농민 이익극대화를 받아들이기 어렵게 된다. 이처럼 사회적 가치는 이제 다양화되고 양립하기 어렵게 된다.
  

그렇다고 할 때 사회적 갈등이 몇 가지나 있고 이것이 사회구성원들의 분포도와 유사하게 반영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을 반영할 수 있는 창구가 필요한 것이다. 즉 다양한 사회적 갈등이 다양한 정치대표체계안에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이제 사회적 갈등이라는 정치적 수요에서 이를 반영하는 정치적 공급으로 시선을 옮겨야 한다. 정치대표제도들이 사회적 갈등을 임의로 동원되거나 배제하면 인민들의 주권은 현실적으로 구현될 수 없다. 따라서 제도정치 안에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존재하고 있는 사회적 갈등을 증폭하여 가시적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이 증폭장치의 역할을 정당이 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정당은 사회적 갈등을 동원하는 중요한 제도장치가 되는 것이다.
  

정당은 사회갈등을 강화하고 갈등의 규모를 키운다. 하지만 갈등의 수는 줄인다. 노동자들이 가진 이해관계가 자본주의의 분배문제에 있다면 이러한 분배문제로 고통을 받고 있는 농민이나 사회적 소수자들도 같은 이해관계에 있다는 점을 설득하여 하나의 세력을 규합해야 한다. 이처럼 정당은 사회적 갈등을 단수화하고 연대를 통한 세력결집을 지향한다. 그래야 실제 권력을 쥐고 권력을 통해 자신들이 지향하는 가치를 추구하며 사회적 문제를 통제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적 갈등은 이제 정당에 대한 지지율로 나타나게 된다.
  

정당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민주주의를 갈등의 분출과정으로 이해한다면 민주주의는 끊임없는 사회적 갈등의 경합장이 된다. 그 갈등이 풀리게 될지 아니면 권력획득과 배제사이에서 더 증폭하게 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사회내에 다양한 가치와 다양한 사고가 있고 이것이 반영되어야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는 원칙은 정립된다. 그렇게 될 때 민주주의는 절차적인 공정성이 보장된 투쟁의 규칙이 된다. 투쟁 이전에 이미 누군가가 승리할 수 있게 규칙이 형성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쉐보르스키가 지적한 ‘전환가능성’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한국의 현 정치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과연 정당들은 사회적 갈등을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는가? 그리고 이러한 갈등의 증폭과정을 통해서 세력화에 나서고 있는가? 아니면 작은 갈등을 키워서 사회적 갈등인 것처럼 편향된 갈등을 동원하는 것은 아닌가? 한국정치에 대한 애정은 한국정당정치에 대한 날카로운 평가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래야 마음에 들지 않는 이 정치를 변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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