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정의로운 사회, 大人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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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정의로운 사회, 大人이 그립다
  • 법률저널
  • 승인 2012.07.20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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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학장/변호사/시인

 

大人이 그리운 세상이다. 눈앞의 잔돈 몇 푼에 양심을 팔고, 공직자로서의 지조를 팔아치우는 저 곡학아세의 벼슬아치들의 뺨을 때려주고 싶다. 이명박 대통령의 부속실장 김희중이 저축은행으로부터 억대가 넘는 뇌물을 받은 혐의로 검찰에 소환되었다. 이명박 정권 줄줄이 사탕의 마지막 알사탕 한 알을 빼서 검찰이 빨아먹고 있다. 그 사탕알은 얼마 가지 않아 녹아 없어질 것이다. 청와대부속실장은 문고리실장이라고도 불린다. 왜냐하면 청와대 부속실장이 잡는 문고리는 바로 이명박 대통령의 집무실 문고리이기 때문이다. 그가 문고리를 돌리면 이명박 대통령의 집무실이 나오니, 이명박 대통령을 면담하고자 하는 총리, 장관, 재벌총수 등 모든 사람은 김희중 부속실장의 호위호가를 일단 거쳐야만 이명박 대통령을 접견할 수 있다. 그 이전 정부에서도 청와대 부속실장은 모두 로비대상이었고, 수많은 부속실장들이 로비에 넘어가 뇌물을 받은 죄로 구속 수감되었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심복으로 15년 동안 지근거리에서 그를 모셨다는 김희중 부속실장 역시 예외는 아니었는지, 저축은행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가 공개되자 며칠 전 전격적으로 사표를 내었고, 청와대는 며칠 꿀 먹은 벙어리 흉내를 내더니 순식간에 사표를 수리해 버렸고, 결국 김희중은 검찰에 소환되었다.


저렇게 엄청난 목돈을 순식간에 한꺼번에 뇌물로 받으면 얼마나 옹골질까? 갑자기 엄청난 공짜돈이 생겼으니, 그 돈으로 아내에게 멋진 명품 백을 사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을까? 그 돈으로 사랑하는 아이에게 멋진 선물을 사 주고 싶고 용돈을 듬뿍 주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그러면서 “여보, 나 이런 남편이야”라거나, “나, 이렇게 능력 있는 아빠야” 하면서 있는 폼 없는 폼 다 재지 않았을까? 아니면 자기 말이라면 죽기라도 할 듯 충성하는 또 다른 그 어떤 졸개(?)에게 용돈에나 쓰라며 일부를 뚝 떼어 주지 않았을까? 그러면 그 어떤 졸개가 황공 감사해 하며 “뭐, 이런 것을 다......”하면, 호기롭게 “아니야, 받아둬, 그 동안 수고했는데 용돈으로 쓰지 뭐.” 하면서 똥폼(?)을 다 잡지 않았을까? 졸개라는 말을 쓰는 나의 詩人的 想像力은 끝이 없이 전개된다. 아마 처음에는 그런 부정한 돈을 받을 때 겁을 냈을 것이다. 혹시라도 들키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감으로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을 것이고, 주변을 조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주 그런 돈을 받다 보면, 또 돈을 받는다는 만만한(?) 소문이 나게 되면 여기저기에서 돈을 건네는 사람들도 겁대가리(?) 없이 돈을 건네는데 망설임이 없게 되니 받는 놈도 망설이지 않고, 주는 놈도 망설이지 않는 아주 황당한 시추에이션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이다. 받아도 받아도 가져다주는 놈이 넘쳐나니 세상에 이리 좋은 자리가 또 있을까 하면서 얼마나 기고만장하며 히히덕덕거렸을까? 천년만년 그 자리가 유지되기를 바랐을 것이니, 그를 방해하는 모든 이들을 적으로 돌려 처치해버리는데 추호의 망설임이 없지 않았을까?


부정한 돈을 받아 안쪽 호주머니에 챙기고, 또 다른 돈을 받아 바지 호주머니에 챙기고, 여기도 뿔룩, 저기도 뿔룩해진 호주머니를 탁탁 손으로 쳐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거나, 아니면 남들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의젓함(?)으로, 자신만이 청렴결백한 청백리의 표본인 것처럼 입 씩 닦고, 손 탁 털면서 퇴근길에 나서는 탐욕의 지저분한 모습을 상상해 본다.


네 명의 대법원장 후보자 및 현병철 국가인권위원장의 인사청문회를 지켜보며, 어떻게 저런 인품과 삶의 족적을 가진 사람들이 저렇게 높은 고위직까지 올라갈 수 있었을까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나의 도덕적 잣대가 유난스러워만은 결코 아니지 않겠는가? 사회지도층이라며 좋은 자리에서 많은 보수를 받으며 호의호식하고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이 국가와 사회를 위한 최소한의 공적 희생정신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그게 국가와 사회로부터 받은 은공(?)에 대한 공직자로서의 마음가짐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대한민국은 어찌 된 것인지, 사회지도층(?)이라는 이상한 지위에 오르게 되면, 아주 사소한 사적 이익에 함몰되고, 권력을 남용하여 이러저러한 이권에 개입하고, 단물을 빨아먹는데 혈안이 되어 있으니, 아무리 자본주의라는 가치기준이 돈, 돈, 돈 하는 세상이라고 하더라도 , 그래서 “정의와 헌신”을 기대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해도 해도 너무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드는 것이다. 나는 괜히 저 사람들의 인사청문회를 지켜보며, 부끄럽다, 그리고 슬프다. 저런 불법행위를 서슴없이 행하는 자, 약자를 위한 연민의 마음이 없는 자들이 대법원에서 사법정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이며,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국민의 인권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자문하니 답답해지기 때문이다. 


정의가 사라진 세상은 바로 지옥이다. 더군다나 불의가 악한 힘을 가지고 정의를 핍박하는 세상은 바로 아비규환의 생지옥이 된다. 정의는 이 세상의 내비게이션이다. 이정표이고 목표지향점이다. 정의에 대한 정의가 혼돈에 빠지게 되면, 이 세상은 말 그대로 개판이 되고 마는 것이다. 초복날 수많은 사람들의 보신탕으로 사라졌을 개들이 들으면 기분 나쁘겠지만, 사람 사는 세상이 개만도 못한 개판이 되는 것을 개들이 알면 컹컹 하며 짖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개도 사람들에게 맞아죽고, 보신탕으로 팔려가는 것을. 그래서 가진 사람들은 세상을 개판으로 만들려고 발버둥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느날, 개는 한 번쯤 이빨을 세워 물을 것이다. 개에게 물리면 사람이 광견병에 걸릴 수도 있지 않겠는가? 무섭다.


필자가 지난 주 칼럼에서 5ㆍ16은 군사쿠데타일 뿐이라고 쓰자마자, 박근혜 의원은 “아버지인 박정희로서는 5ㆍ16군사쿠데타가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라며 5ㆍ16에 대한 그의 생각의 일단을 드러냈다. 많은 이들이 그녀의 생각에 우려를 나타내자, 또 다른 망언이 이어졌으니, 자기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는 것이고, 미래로 나아가야 하는데 과거 5ㆍ16에 매달려 있는 것은 아주 웃기는 일이라는 듯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5ㆍ16을 혁명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으니 혁명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 그녀는 정의를 “다수결로 정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엄청난 실수를 범하고 있음을 충고해 주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실수가 아니라 확신일 것이니 충고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만은, 아무리 민주주의가 다수결로 전체의 의사를 결정한다고 하지만, “정의는 다수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단 한 사람의 의견일지라도, 아니 이 지구가 멸망하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객관적으로 결정되는 가치”일 뿐이다. 박근혜의 5ㆍ16에 대한 역사의식을 보면 마치 “흉악한 유괴범이 어린 아이를 유괴한 후 그 아이를 잘 먹이고 잘 입히면 유괴범의 죄가 성립하지 않고 용서”된다는 논리인 것 같아 섬뜩하다. 1961년 당시 가난하고 못살았던 대한민국이었기에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하고 경제를 부흥시켜 국민을 보릿고개에서 해방시켰으니 구국의 결단이고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그녀의 논리는 궤변의 수준을 뛰어넘는다. 명백한 헌법유린을 호도하는 그녀의 말은 감언이설일 뿐이다. 이를 비판하는 이를 향해 왜 자꾸 과거를 물고 늘어지냐고 힐난하는 것이야말로 적반하장이고 후안무치한 일이다.


과거는 결코 과거로 사라지지 않는다. 과거는 현재에 존재하는 진정한 현재이다. 과거가 녹아내려 현재를 이루고, 현재의 그가 과거에 했던 행동을 미래에 하는 것이다. 내 어머니께서 내가 어렸을 때 항시 하시던 말씀이 있다. “나무양판은 결코 쇠양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50여 년 전 쇠양판이 귀했던 시절, 나무로 만든 그릇을 양판처럼 쓰던 시절, 나무양판과 쇠양판의 차이는 엄청 났던 것이다. 나무양판이 쇠양판이 되지 않는다는 어머니의 가르침은 60평생을 살아온 내 경험에 비춰볼 때 진리 중의 진리이다. 과거의 자신을 바꾼다는 것은 천지개벽에 준하는 사건에 속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 박정희가 부하 김재규의 총에 맞아 시해된 경험조차 김재규가 법정에서 최후진술로 주장한 유신의 심장을 쏜 구국의 혁명이라는 변론에 동의하겠다는 뜻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김재규의 시해사건으로 유신시대는 종말을 맞았다. 그렇게 최선의 선택일 수밖에 없었다고 그녀가 강변하는 유신시대는 그렇게 허망하게 종말을 맞아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꿰차고 들어선 12ㆍ12반란세력인 전두환ㆍ노태우도 반란수괴죄로 사형선고를 받지 않았는가? 객관적 역사를 주관적 평가로 호도해서는 아니 된다. 정의는 객관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을 보며, 또 다시 이 사회의 소통부재를 절감하게 된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하던 자기의 생각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 이것은 소통의 철저한 부재를 의미한다. 새누리당은 이명박정권과 한 배를 탄 동지들이다. 그런데 마치 오월동주처럼 딴 나라 사람 보듯, 적을 보듯 대하는 현재의 새누리당의 행태를 보면 참으로 당혹스럽다. 이렇게 한 순간에 국민에게 새누리당은 이명박정권과 별개의 정당인 것처럼 착시현상을 가져오게 만든 “홍보전술”은 대단하다고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본질을 꿰뚫는 시각에서 보면 그건 홍보에 의한 착시현상일 뿐이지, 진정한 소통에 의한 공감은 아니다. 공감되지 않는 소통, 홍보에 의해서 만들어진 착시현상은 접착력을 상실한 접착제의 일시적 효과에 불과할 뿐이다. 접착력이 사라진 접착제는 제 기능을 상실하게 되고, 착시현상에 사로잡힌 자들은 꿈에서 깨어나듯 현실을 직시하게 될 것이다.


아버지의 쿠데타를 쿠데타라 무릎 꿇고 인정하고, 나는 다시는 그러한 비극적인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국민과 소통하며 진정한 민주주의,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환골탈태의 변화된 새사람을 보여주어야 한다. 과거에 갇혀 있는 자는 미래도 과거의 연장일 뿐이다. 과거를 벗어나지 않는 자는 영원히 미래가 없다. 그 미래는 여전히 그 과거일 뿐이니까 말이다. 내 청년시절, 유신독재와 5공군부독재의 그 악랄했던 탄압과 억압의 시대로 회귀하는 것은 진짜 싫다. 그 시절의 고통을 망각하고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들, 그들은 그 시절에 단물을 빨아먹은 마지막 알사탕 한 알이어서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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