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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권영준 시인의 “따뜻한 시체”와 봄이 오는 길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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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권영준 시인의 “따뜻한 시체”와 봄이 오는 길목
  • 법률저널
  • 승인 2012.02.24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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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학장/변호사/시인

봄이 오고 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봄이 오고 있다. 참으로 세상은 묘한 것이어서 겨울이 고약할 때는 봄이라는 것을 아예 잊게 하더니, 겨울이 혹독을 떨다 스스로 제 풀에 지쳐 나가떨어지니 봄이라는 게 실핏줄처럼 하늘을 제 살 삼아 퍼져있던 앙상한 가지 끝에서 오고 있고, 땅 끝 그 단단한 바윗돌 사이에서 오고 있다. 소리 없이 오고 있으니 참으로 신기하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권영준 시인의 시 “따뜻한 시체”를 본다. “고추모종을 심다가 알았다./한때/삶이었던 누군가의 살이 썩어/봄의 물관을 타고 올라오는 것들,/햇살이 발효시킨 누군가의 시체들이/한 삽의 거름이 되어/열매가 되었다가/내 몸 속으로까지 흘러들어왔다//아이는 아마 모를 것이다/자신이 탐하는 것이 무엇임을 아는 순간/하루에도 수십 번씩 열어젖혔던 냉장고를/경악스런 눈길로 바라볼 테지만,/누군가의 반짝이는 눈동자와 펄떡이는 심장이/애틋한 어둠이 되어 찌개 속에서 끓고 있다는 것을/나는 아이에게 가르쳐야 한다//흙으로 산화해가는 벌레의 주검이 무서워/두 눈을 찌푸렸던/부끄러운 과거에게 미안하다/고추모종 안에 죽어있는 지렁이를 두 손에 받쳐 들고/내 삶을 끌고 가는 아름다운 시체에게/경배하노니/아, 세상의 모든 죽은 것들에 /돌고 있는 따스한 피”(전문, 시산맥 2012년 봄호 발표).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최초의 남자 아담은 “아다마”라는 말에서 유래한다. 아다마는 붉은 흙이라는 뜻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최초에 인간을 흙을 빚어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죽어서 원래의 모양대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흙은 모든 생명의 최초 시발점이자 최종 종착지이다. 모든 생명은 죽어 흙으로 돌아간다. 권영준 시인의 시 “따뜻한 시체” 역시 생명의 기원과 종말을 윤회사상 속에서 잘 표현하고 있다. 고추모종 안에 죽어 있는 지렁이 한 마리에서 죽은 시체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따뜻한 시체인 것을 깨닫는 권영준 시인은 고추모종을 위해 기꺼이 거름이 되고자 했던 죽은 지렁이의 영혼을 향해 한순간 묵념했을 것이다. 생명의 경이로움을 깨달으며, 이러한 생명에 대한 외경심을 잃어가는 이 시대의 어린 아이들에게, 젊은이들에게 냉장고 안에 저장되어 있는 저 많은 먹거리들이 한때는 따뜻한 생명체였음을 알고 있느냐고 반문하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 또한 죽어 흙이 될 것을, 그래서 어떤 다른 식물의 영양분으로 기능하게 될 것을, 그 것을 우리 누군가의 후손이 먹게 될 것임을, 그러기에 우리가 지금 우리보다 먼저 내생했다 사라진 다른 생명체들의 진액을 빨아먹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권영준 시인의 눈에는 차갑게 식어버린 모든 시체조차 따뜻한 생명의 근원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더 나아가 시인은 어른들에게, 엄청난 권력과 재력을 가진 강자들에게도 너희가 먹어치운 그 많은 힘, 에너지들이 어려운 약자들의 고혈을 빨아먹은 것일 수도 있음을 강력하게 경고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권력자들, 재력가들의 권부에, 호주머니에, 금고에 가득 보관되어 있는 고등어, 갈치, 명태, 쇠고기, 돼지고기, 양배추, 시금치, 상추 등이 모두 한때 가난하지만 따뜻한 생명체였음을 알고 있느냐고 반문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하루도, 이 세상사람 모두가 세상의 모든 죽은 것들에 돌고 있는 따스한 피를 느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 잠긴다. 이제 19대 국회의원선거가 50일이 채 남지 않았다. 이번 선거는 아마 대한민국 역사상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여는 분기점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한때 유럽을 풍미했던 18세기 계몽주의 사상은 모든 인간을 합리적 이성체로 보았다. 계몽주의는 모든 이성적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보았고, 그러한 자유의지의 발현으로 자유주의, 개인주의 사상이 시대의 조류가 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자유주의, 개인주의 사상은 이 세상이 결코 이성적 인간들로 가득한 세상이 아니라는 경험론에 의해, 수정되기에 이르렀지만, 이미 자유방임주의 시절에 확고하게 세력을 결집한 사회적 강자들에 의한 독식의 기회가 이후에도 계속해서 더욱 보장되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치유되기 힘든 상태에 도달한 것이 오늘의 현실인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한 중심에 프리드만을 중심으로 한 시카고경제학파들의 신자유주의론이 있다. 그들이 세계경제의 주류가 되면서 금융시장의 왜곡이 발생했고, 그러한 결과가 99%에 의해 “월가를 점령하라!”는 저항이 세계적 현상화가 되었고, 지금 우리에게도 계속 진행 중에 있다.


경제학자 존 캐서디는 이러한 사회적 현상을 직시하고, 아담 스미스, 프리드만 등의 주류 경제학자들의 경제이론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그의 저서 “어떻게 시장은 실패했는가(How Markets Fail)”에서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즉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라고 단언하면서, 자본주의시장경제의 이론적 근거였던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즉 시장을 구성하는 모든 구성원들이 보이지 않는 손(합리적 인식에 근거한 합리적 행동)에 의해 시장에서 합리적인 경제활동을 통한 시장이 정상적 작동으로 경제발전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이론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강력하게 지적하고 있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손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것이라는 환상을 일반 국민들에게 심어놓고, 이를 이용하여 대기업들은 오히려 독점력을 악용하여 부당이득을 취하고, 의료보험이 필요한 빈곤층에 오히려 무의료보험정책을 실시하고, 기업의 축적된 자본으로 반복적 금융투기를 일삼음으로써 시장경제를 왜곡하는데 앞장서 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보이지 않는 손의 기능을 대기업들은 수행하지 않고 거꾸로 “자신들의 탐욕”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악용했다는 것이다. 

그런 예는 우리 국민들이 즐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고스톱판에서도 자주 벌어지고 있다. 선수와 초짜가 함께 어우러져 고스톱을 치는 경우, 선수는 합리적으로 패를 내지만, 초짜는 그냥 맘 내키는 대로 패를 내기 때문에 오히려 고스톱판이 어지럽혀지면서, 초짜가 왕창 돈을 따거나 그 옆에 있는 다른 사람이 어부지리를 취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도로에서 혼자 교통법규를 지키지 않고 신호를 위반하여 과속운전하다가 제 죽는 것 모자라 엉뚱한 선의의 운전자를 사상케 하는 경우가 그 경우인 것이다. 이러니 힘없는 99%가 모두 고속도로에서 무한질주하는 1%의 무한탱크 앞에서 추풍낙엽이 될 수밖에 없는 현상이 강고화되어가고 있는 현실, 그 현실을 타파하는 선거가 이번 19대 국회의원선거가 될 수 있을 것인지 주목되고 있는 것이다.


새누리당이 국민과의 약속이라는 이름으로 정강정책을 대폭 수정하였고, 민주통합당이나 통합진보당 역시 비슷한 정강정책을 내세우고 있으니, 어느 누가 총선에서 승리하더라도 서민경제에 유익한 경제정책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문제는 이것이 기대에 그치고 말 것인지, 아니면 실행에 옮겨질 것인지 여부라고 하겠다. 그런데 육십을 살면서 내가 내린 결론은 사람은 참으로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거판을 보면 국민들의 선택이 자주 바뀌지 않느냐고 반문하겠지만, 이게 일정집단을 대표하는 자들은 더욱 그 집단의 상징성으로 인한 “골수분자”인 경우가 일반적이기 때문에 일정집단의 구성원들이 이만 하면 되었다고 하는 것 이상으로 “과잉집중”을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사상이나 행동을 쉽게 바꾸지 못한다. 불행히도 만인으로부터 사랑받고 싶어 하는 불쌍한 정치가들은 그 일정집단의 다수의 의견을 따르거나 일부 소수의 의견을 존중하는 선에서 양보와 타협을 해야 하는데, 불행히도 마지막에 서 있는 그 최후의 일인으로부터도 칭찬을 받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이 그 마지막 최후의 일인 뒷자리에 줄을 서기 때문에 저절로 골수분자가 되어가는 것이다. 항시 절벽 끝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정강정책을 미사어구로 바꾸고 그럴 듯한 포장을 하더라도 결코 본질이 바뀌지 않는 것이다. 19대 총선에서는 박근혜 비대위원장의 “정수장학회”가 핵심주제로 떠오르고 있다. 4ㆍ11총선의 최대이슈가 될 전망이다.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미 정치적 이슈가 되고 있다. 거기에 지난 21일 개관된 박정희 대통령의 기념관 개관이 오버럽되고 있다. 그의 功過는 극과 극으로 나뉘어져 있다. 조국근대화의 기수로 보리고개를 잊고 근대화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평가와 독재자로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반대자들을 고문과 감금 등으로 탄압하였다는 평가가 그러하다. 양쪽 다 맞는 말이다. 모두가 객관적 사실로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의 기념관개관을 통해 그의 공이 부각되는 것만큼 과도 부각될 것이고, 과의 중심에 현존하는 그의 유물 “정수장학회”가 있다. 정수장학회가 부산일보 내에 있던 김지태씨의 부일장학회를 5ㆍ16혁명 후 강제헌납받아 5ㆍ16장학회로 명칭변경한 후 나중에 전두환 정권시절 5ㆍ16이라는 이름이 군사혁명정부였던 전두환 정권의 군사독재를 연상케 한다는 이유로 이미지가 좋지 않다고 충고(?)함으로써 박정희 대통령과 부인 육영수의 이름자를 한자씩 따와 지은 장학회라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過의 산물인 정수장학회”가 이번 총선에서 야당의 주공격목표가 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나와는 상관없다.”는 한 마디로 버티고 있는 상태에서, 이를 국민이 어떻게 평가할지는 총선결과와도 상관성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는 지경에 놓이게 되고 말았다. 서로 물고 물리는 정치현상을 보면서, 다시 한 번 권영준 시인의 “따뜻한 시체”를 소리 내어 읽어본다. 지혜로운 자라면 죽은 것조차 따뜻하게 생명으로 연결하는 “생명의식”을 “실천”할 것이다. 우리 모두 지혜로운 마음으로 세상을 바로 보고 살면 좋지 않겠는가? 언젠가 우리 모두는 따뜻한 시체가 되지 않겠는가? 우주는 오늘도 변함없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참 무망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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