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섭의 정치학-전쟁, 민주주의, 휴머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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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의 정치학-전쟁, 민주주의, 휴머니티
  • 법률저널
  • 승인 2012.02.17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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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형 인간들의 세상 (2)

 

신희섭 베리타스

요즘은 3한 4온이 사라진 듯 하다. 며칠 매우 춥고 또 며칠은 봄처럼 따뜻하기는 하지만 그 주기는 깨어졌다. 춥고 따듯해지고를 주기적으로 반복할 경우 ‘기대 혹은 예상(expectation)’이 생긴다. 아 내일부터 춥겠구나하고 생각하고 단단히 옷차림을 무장하고 나가기도 하고 내일부터는 따뜻할 테니 좀 살만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날씨를 모르고 지내는 것과 미리 대비하는 것은 그래도 확실히 다르다. 예전 기억에 날씨예보를 안보고 얇은 옷차림으로 나갔다가 하루를 오돌오돌 떨었던 기억이 있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누구에게 화를 내야 할까를 몰라 더 화가 났었던 기억.

그 일 뒤에 일기예보를 꼭 챙겨서 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되도록 보려고 노력하고 아니면 집을 나서기 전에 가족들에게 묻기라도 한다. 괜히 우산을 준비 못했다가 편의점에서 우산을 사는 것도 아깝고 그렇다고 비를 맞고 다닐 수도 없고 해서. 그러고 보면 기대(expectation)는 확실히 중요하다.

지난 시간의 주제를 이어가기 전에 장황하지만 기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경제학에서 ‘기대(expectation)’라는 심리가 반영된 것이 정확하게 몇 년도 부터인지는 몰라도 그런 설명이전에 사람들은 기대를 통해서 경제활동을 하고 사회활동을 하여왔다. 어려서 잘못을 하고나면 그날 저녁에 돌아올 어머니의 호통과 호통의 정도와 호통의 시간 등은 일찍이 우리를 ‘기대형인간’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 기대들은 점차 일정한 방향으로 학습된다. 비슷한 일로 혼나지 않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해야 할지를 생각하게 하고 그것을 피하게 한다. 나쁜 사례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고 좋은 사례에서도 그렇다. 나는 초등학교때(당시 용어로 엄밀하게 하면 국민학교때) 매달 나오는 만화잡지였던 ‘어깨동무’나 ‘소년중앙’을 보려면 매달 보던 시험에서 상장을 받아야 했다. 다음 이어지는 만화를 보기 위한 한 달이 꽤나 길었다.
 
사람들은 기대를 통해서 미래를 예측하면서 현재를 산다. 그러나 사람들이 어떻게 미래를 예측하고 현재를 대비하는지는 다르다. 지난 시간에 한국정치의 복지논쟁과 정당의 명칭 변화 그리고 새로운 인물론이라는 몇 가지 현상으로 ‘보고서형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지난 시간의 주제를 조금 더 이어가 보자. 현재의 사회적 추세를 보면 세 가지 유형의 인간군상을 만날 수 있다. 그 첫 번째는 ‘소설형 인간’이다. 이 유형의 인간에게는 서사(narrative)가 중요하다. 서사구조 속에 있는 이야기(story)가 중요하다. 세상을 서사와 이야기로 보면 ‘나(I)’라는 주체는 다른 서사속의 주체들(You 혹은 They) 속에 존재하게 된다. 내가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를 만들어가거나 다른 누군가의 조연을 하거나 모두 이야기속의 한 인물이 되고 그 이야기는 지속적으로 전개된다. 이런 유형의 인간은 자아와 타자 그리고 주변환경과 주변인들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인다. 마치 대하소설이 큰 흐름속에 작은 이야기들로 구성되듯이 자신의 인생이라는 작은 이야기도 큰 흐름 속에서 작은 부분을 이룬다고 보면서 더 큰 서사시인 세상에 대한 이야기 한 부분을 채워가는 것이다.

두 번째 인간 유형은 보고서형인간이다. 한 두 페이지 정도로 요약된 보고서를 읽어내듯이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을 대처하는 유형이다. 보고서는 압축이 생명이고 그 핵심만 간단히 정리해야 한다. 왜 그렇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한 짧은 분석은 어떻게 대비할 것인지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 내면에는 진짜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여러 가지 배경이나 인간적 조건이나 찰나적 순간들이 만들어내는 우연적인 요소들은 없다. 서사구조는 사라지고 짧은 단막극처럼 속도가 중요하게 되고 결론에 빨리 도달하게 된다. 보고서에 논리는 있지만 짧은 몇 줄 이면에 존재하는 긴 이야기나 공감대는 없다. 그리고 ‘왜(why)’에 대한 끈질긴 고민이 없기 때문에 세상을 설명하기 위한 이론 역시 없다. 따라서 왜 그랬는지와 그래서 어떻게 될 것인지를 관통하는 행동 자체들의 ‘목적’에 대한 고민은 없다. 보고서가 다음 보고서로 대체되듯이 빠른 이해와 즉답적인 해법은 다음 보고서와 다음 해법에 의해 즉각적으로 대체된다. 보고서가 왜 그렇게 요약되었는지와 요약과정에서 무엇이 사라졌으며 무엇이 보태어졌는지 보다는 빠른 요약으로 복잡한 현실에 대한 간결한 추상화와 명쾌한 이해가 중요하게 된다. 이것은 보고서를 만들어내는 사람에 대한 ‘도전받지 않는 믿음’과 ‘요약된 정보에 대한 맹목’으로 이어진다. 특히 세상이 복잡해지고 전문화가 되면서 전문가 중심의 세상으로 진행될수록 요약을 잘 해주고 빨리 이해할 수 있게 가지를 쳐주는 전문가들에 대한 맹신이 만들어진다.

세 번째 유형의 인간은 ‘문자메시지형’ 인간이다. 140자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트위터처럼 문자메시지는 속도와 간결함이 생명이다. ‘즉답성’과 시간을 공유하면서 같은 매체에 연결되어 있다는 ‘공유감’이 핵심인 이 메시지장치들은 인간도 그러한 유형에 적합하게 만든다. 속도의 중시는 핸드폰에서 경이로운 문자타이핑기능을 만들어낸다. 즉각적인 수신과 즉각적인 반응이 없으면 같은 매체에서의 공존감이 사라지고 이것은 불안을 만들어낸다. 문자이후 10분이 지나면 문자가 씹히는 것이 아닌가를 걱정한다. 온라인상에 같이 존재하고 있다는 존재감은 오프라인을 무시하면서 진행이 되기도 한다.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여럿이 모여서 아무도 상대방과 대화하지 않고 스마트 폰속에 빠져서 사회적네트워크(SNS)를 만들면서 인간의 소외감을 이야기 하고 있는 이질적인 현상이 대표적이다. 어느 순간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감이 사라지게 되고 자신이 매체의 노예처럼 되었다는 것을 핸드폰을 잊어버리면 깨닫는다. 문자메시지형 인간의 세상에 대한 이해는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140자’이다. 더 넓어지면 즉답적인 사고를 방해한다. 스토리는 중요하지 않다. 나와 문자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지만 메시지를 통해서 전체적인 사회트렌드를 알 수 있고 어떤 것이 변화하고 있고 이 속도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면 어떤 제품을 구매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보고서형인간보다 더 빠른 결론도달의 욕구는 논리도 무시할 수 있다. 빠른 전달과 공유감을 위해 언어는 왜곡되고 새로운 유형으로 창조된다. “ㅠㅠ”라는 이모티콘이 눈물을 흘리는 자신의 심경이 되며 문자에도 뉘앙스를 만드는 세상이 되었다. 긍정적으로 볼 때 우리는 이 속에서 놀라운 언어창조능력과 도구를 통한 의사소통능력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언어 습관속에서 인간삶의 서사구조와 목적적인 동기와 환경과 주변인에 대한 맥락적인 이해는 점차 부족하게 된다. 전체구조보다는 나를 중심으로 하는 구조가 있게 되고 빠른 속도로 전달되는 정보는 걸러지기 이전에 흡수되어진다. 다양한 신조어들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정서를 장악하며 빠르게 기뻐하고 빠르게 슬퍼하게 된다.

어떤 스님께서 방송에 나와서 자신의 연봉이 얼마인지 아느냐며 큰 소리를 낸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의 연봉이 30억 정도 된다며 자신의 가치가 얼마나 높은 사람인지를 이야기 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불쾌해진다. 왜 그런가? ‘30억’을 버는 것이 영 못 마땅해서? 아니면 ‘스님’이라서? 아니면 더 큰 틀에서의 ‘종교지도자’라서? 이유는 복합적이다. 만약 ‘소설형인간’의 관점으로 사회를 본다면 이 스님은 주변의 환경과 자신이 속한 종교와 자신의 역할에 대해 파악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불교는 자본주의이전의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연봉논리 이전의 종교이다. 자신이 말한 연봉이라는 것을 부처님이 셈해서 주지 않는 한 그 돈은 신도들의 시주에서 나왔을 것이다. 사람들이 시주를 할 때 그들은 자신의 내세에 대한 두려움과 현세에 대한 복을 기도하면서 부처님에게 봉양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돈이 부처님의 뜻이 퍼져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경험을 하면 좋을 것이라고도 생각했을 것이다. 스님의 고급외제차와 고성능 휘발유에 들어가기 우해서 봉양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스님은 자신의 역할을 큰 그림 속에서 이해하고 있지 않다. 그는 요즘 연봉, 외제차, 명품으로 이어지는 자본주의 논리가 작동하는 세상의 그림과 논리만으로 자신을 본 것이다. 그리고 ‘자신만’을 본 것이다. 이런 사람은 보고서형 인간이다. 다시 세상의 논리들이 빨리 바뀌면 자신의 목적과 역할도 바뀐다.

민주당이 선거에 들어가면서 “99%의 국민을 위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민주당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은 월가의 시위자들 수준이다. 우리나라 경제문제가 1%의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99%의 문제인가? 99%안으로 지지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누군지도 모르는 1%을 적으로 삼는 논리를 펴면서 ‘통합’을 이야기하고 민주통합당이라고 한다. 한명숙대표는 오바마 대통령에게 한미 FTA철회서한을 보내면서 “서한이 오바마에 전달돼서 그들의 심금을 울려 발효가 중단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국익이 충돌하는 외교현장에서 무서울 정도로 합리적인 경제문제의 협상을 해놓고 “심금을 울려서 변화를 기대”한다고 한다. 미국이 그렇게 심금을 울리는 편지를 쓰면 우리는 눈물을 흘리면서 재협상에 들어갈까? 한국의 소비자들이나 생산자들이 그렇게 만만하게 글자 몇 개에 자신들의 입장을 바꿀까? 그러지 않으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면서 왜 이들은 이런 희한한 주장을 할까?

그것은 자신에게 표를 던지는 유권자들이 보고서형 인간이거나 문자형인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 현재의 추세를 반영하면 지지를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몇 개월 앞도 고려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대통령 한사람이 정치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모든 선거이후 뼈저리게 느끼면서도 다시 문재인대세론 안철수대세론이 박근혜대세론을 누르는 것에 유권자도 정치인도 흥분한다. 현재 한국의 학교폭력문제 과도한 교육열과 성과부재의 문제나 비정규직의 문제와 양극화의 심화와 20대 실업문제 등은 이런 보고서유형의 접근에 의해서 해결될 수 없다. 우리에게는 소설형인간과 소설형접근이 필요하다. 일단 서로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보자 또한 우리의 서사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우리는 한국의 이야기를 지금 어느 방향으로 써가고 있나와 그렇게 하기 위해 얼마나 당신(you)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자. 그래야 우리는 이 지긋지긋한 ‘열망과 실망’이라는 한국정치의 주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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