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섭의 정치학-전쟁, 민주주의, 휴머니티
상태바
신희섭의 정치학-전쟁, 민주주의, 휴머니티
  • 법률저널
  • 승인 2012.02.03 13: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리는 무엇에 대해 분노하는가?

신희섭 베리타스

작년에 이어 올해도 한편의 영화가 한국사회를 흔들고 있다. 영화 ‘부러진 화살’은 작년의 영화 ‘도가니’에 이어 한국사회를 다시 한 번 분노하게 만들고 있다. 작년 ‘도가니’의 열풍이 불 때 나는 극장에 가지 않았다. 극장에서 그 무거운 주제를 다시 본다는 것이 마음이 편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러진 화살’은 좀 달랐다. 그래서 시간을 내서 영화관에 가서 직접 보았다. 그리고 이참에 ‘도가니’라는 영화도 보았다.

영화 ‘도가니’가 다룬 광주의 인화학교는 뉴스프로그램으로 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 당시 다른 시사프로그램들과 섞여서 기억의 한자리에서 잊혀 있었다가 지난 해 영화로 인해 다시 기억의 밖으로 나왔다. 그렇지만 ‘석궁사건’은 개인적으로 좀 다르다. 석궁사건으로 지칭되는 김명호 교수사건은 수업시간에 언급했던 사건이다. 그 당시 수업에서 했던 언급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사법부에 대한 얼마나 깊은 분노를 보여주는가 하는 점과 두 번째는 석궁이라는 도구에 관한 것이었다. 사실 석궁이라는 도구가 가져오는 센세이션에도 불구하고 그 뒤의 상황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단지 2004년 탄핵과 수도이전에 관한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나온 뒤에 사회적으로 정치적 문제에 대한 사법부의 판단을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라는 주제의 연장선상에서 그리고 미시적 차원에서 의미있는 사건으로 보였기 때문에 강력하게 각인된 사건이었다.

그 사건의 실체와 당시 기대적인 분위기가 어떻게 진행되었든지와 관계없이 두 영화는 한국사회에 대해 사법부의 문제를 재고하게 만들고 있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분노가 다른 이로 이어지는 희한한 흥행메카니즘이 작동하고 있다. 영화를 본 이들은 인화학교와 관련된 문제를 실어 나르며 다른 이에게 분노하지 않았던 과거를 들추어낸다. 석궁사건에 관한 영화는 무관심속에 지나가버린 한 사람의 사건 속에서 사법부의 집단적 행동에 대해 분개심을 이끌어낸다.

영화는 사회를 비추는 또 다른 거울이다. ‘도가니’와 ‘부러진 화살’이라는 영화는 한국사회의 보고 싶지 않았던 부분을 비추어주고 있다. 그리고 영화는 ‘사법부’라는 공통분모를 통해서 분노를 시너지화한다. 사람들은 분노하고 있다. 그리고 분노는 신문과 방송과 인터넷을 통해서 재생산되고 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 우리는 지금 무엇에 분노하는 것인가? 우리가 영화를 보는 내내 피하고 싶고 고개를 돌리고 싶게 만드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큰 틀에서 구태의연하고 자기 이권을 챙기는 사법부의 배타성인가? 아니면 사법부를 운영하는 법관과 법률전문가들이 이루고 있는 그들만의 리그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들만의 리그자체인가? 아니면 ‘그들’로 구분되는 경계지음에 대한 그들의 부와 명예와 권력에 대한 독점에 대한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그렇게 경계지어진 이들이 사회적으로 가져간 가치에 대비해서 보여주는 무도덕적이고 비도덕적인 태도에 대해서 느껴지는 정의의 부재문제인가? 이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구성된 그들의 문제를 뛰어 넘는 법의 지배가 가지는 구조적인 모순의 문제인가? 법의 지배를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법의 해석이라는 문제로 돌아왔을 때 작동할 수 있는 법치의 본질적인 약점의 문제인가? 아니 다른 각도로 보았을 때 장애우나 해직된 교수와 같이 사회적약자가 된 이에 대한 강자들의 잔인함과 폭력 행사에 대한 불쾌감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인간이 가진 보편적인 도덕원리에 반하는 인간들의 비도덕성이라는 본질적인 문제인가? 즉 원죄와도 같은 인간조건 자체의 문제인가? 아니면 사법부의 문제라기보다는 법을 해석하는 ‘인간집단’과 법의 해석을 맡긴 ‘인간집단’사이의 소통의 불능이 문제인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정치적인 문제로서 민주주의가 작동해야 할 공간으로서 사법부가 자리하고 있는 한국사회에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문제인가?

우리는 영화를 보는 내내 그리고 영화관을 나온 내내 이 복잡한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하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고 있다. 분노가 그 효과를 발휘하여 다음 분노로 이어지지 않고 잘못된 곳으로 분노가 흘러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분노의 원인을 정확하게 찾아야 한다.

사법부는 오랫동안 성지처럼 자리잡아 왔다. 그곳에는 법이라고 하는 전문적인 영역의 명패가 박혀있어서 일반인들은 쉽게 접근하기 어렵다. 오죽 하면 “법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일반인들에게는 칭찬이자 욕처럼 들리겠는가?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는 영역은 아우라가 있다. 신비로운 아우라 속에서 그들은 신성한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 수 있었다.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이들은 이런 방식으로 권위를 만들어왔다. “전문가적 지식”과 “아우라”는 다른 이들의 접근을 불허했다. 게다가 법의 지배라는 “법치주의”는 중립성이라는 이름으로 이들의 권위를 강화해주었다. 그렇다면 “법치주의를 믿지 못하겠단 말인가?”나 “사법부보다 그렇다면 더 중립적이고 공정하게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장치가 있단 말인가?”라는 질문은 그들의 귄위에 대한 도전을 어렵게 만들어왔다.

그런데 사법부 내부가 드러난 것이다. 그러면서 그동안의 불만들이 격화될 수 있는 발화장치로서 2가지 상징적인 사건을 찾은 것이다. 아우라는 걷혔고 아우라 속의 신성한 권위는 도전받게 되었다. 법관의 장애인에 대한 일반인보다도 못한 인식을 보여준 것이나 법을 무기화하여 비도덕성에 손을 들어 준 것이나 자기 동료를 보호하기 위한 한 피고인에 대한 사법부의 체계적인 공격은 사법부의 권위를 발가벗기게 만들었고 벗겨진 권위는 던져진 달걀을 무서워하는 판사로 영화 속에서 비춰진다.

이 두 가지 사건 속에서 우리가 발견해야하는 것은 권위의 해체이다. 우리가 분노하는 것은 복합적이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그동안 아우라에 쌓여있던 사법부의 권위에 대한 배신과 법치주의의 중립성에 대한 배반이 분노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판사가 어떤 검사가 어떤 변호사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보호받았던 것이 보호받을 가치와 정당성이 있는가에 대한 배신감이 문제의 본질이다.

그렇지만 권위의 붕괴라는 큰 틀에서 보면 그림은 좀 달라진다. ‘권위없음’에 대한 혹은 ‘과다한 권위 부여’ 혹은 ‘정당성의 부여’에 대한 배신감과 그에 따른 분노는 한국의 사회적 발전을 위한 늦었지만 의미있는 계기이다. 이런 분노와 권위 붕괴는 한국사회의 권위주의적 요소들을 하나씩 제거하고 그 유산들을 정리하면서 새로운 시대로 가기 위한 형애화과정과 탈바꿈의 과정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학교의 권위가 무너진 지 오래이고 국가의 권위가 무너진 지 오래이다. 정치인이 낮선 사람보다도 신뢰를 못 주는 현실에서 재벌들은 자기 새끼 챙기느라고 바쁘고 그 자식새끼들은 동네 구멍가게 자리 차지한다고 욕을 먹고 있는 상황이다. 사회운동가들의 추문이나 부패는 이제 식상한 메뉴처럼 되어버렸다. 정치계, 경제계, 사회문화계 어느 곳에서 우리는 권위를 찾을 수 있는가? 부모에게 자식이 대드는 것을 넘어 폭력을 행사하며 가족의 권위구조도 붕괴되어 가고 있다. 이런 권위부재의 시대에 사법부만 아우라 속에 갇혀 있을 수 있겠나?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권위의 붕괴는 새로운 권위를 만들기 위한 긴 진통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권위가 없을 때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정당성도 인정받지 못할 때 지금과 같은 사회적인 분노는 제어되지 않는다. 그리고 갈등은 또 다른 갈등을 낳을 것이다. 아무도 정당하지 않는 상황에서 도대체 누구 말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이러한 권위와 정당성 부재에 따른 고통은 새로운 도덕적 정당성을 찾아내게 만들 것이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나 장하준 교수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것들’은 사람들의 새로운 도덕적 원천에 대한 욕구를 잘 드러낸다.

새로운 창조를 위한 분노. 그런 점에서 사회의 비도덕성에 대해 더 많이 분노해야 한다. 그리고 더 많이 새로운 도덕을 주장해야 한다. “석궁 맞아보셨어요?”라는 질문이 아니라 “우리는 지금 무엇에 분노하고 있나요?”를 물어야 하는 바로 그 시간에 우리가 서있다.    

xxx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전달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하시겠습니까? 법률저널과 기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기사 후원은 무통장 입금으로도 가능합니다”
농협 / 355-0064-0023-33 / (주)법률저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공고&채용속보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