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섭의 정치학-전쟁, 민주주의, 휴머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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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의 정치학-전쟁, 민주주의, 휴머니티
  • 법률저널
  • 승인 2012.01.20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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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 베리타스

탐욕과 두려움과 공유가치(shared value)

구정이 며칠 남지 않았다. 새로운 한해의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하고 오랫동안 못 보았던 가족과 친지들을 만난다는 설렘으로 하던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걱정스러운 일들도 많다. 너무 올라서 살펴보기 겁나는 물가나 전세값 걱정이나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기 어려운 유럽경제상황이나 국제유가급등은 현실적이기도 한 걱정거리를 던져준다.

그러나 이런 걱정이 두려움으로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다. 일례를 들면 사울 마포구 망원동의 망원?월드컵 시장의 상인들을 볼 수 있다. 1970년대 형성된 재래시장인 이곳은 망원동과 성산동주민들을 상대로 생계를 유지해왔던 곳이다. 이곳의 130여개의 점포상인들은 올 8월에 개장을 한다고 하는 홈플러스 소식에 한숨이 깊다. 다른 대형마트가 이미 2개나 들어서 있고 기업형 슈퍼까지 진입해있는 상황에서 홈플러스의 가세는 현재 상황을 더욱 암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곳만 그런 것은 아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살기어려움을 느끼고 폐업을 하는 가게들이 한둘이 아니다. 동네의 슈퍼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편의점들이 채우고 있다. 작은 커피전문점들이 사라지면서 유명커피 브랜드들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대학 앞에 가면 작은 식당들이 문을 닫고 그 자리를 커피가 채우고 있다. 노동력대비 수익이 크지 않은 음식점들은 인력구하기도 어렵고 학교 앞이라서 가격을 올리기도 어려운 상황에 몰리자 폐업을 하고 커피가게로 전환한다. 학교 근처에 식당보다 더 많은 커피집들이 있다. 커다란 재래시장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물건이 싸지만 운반하기 어렵고 청결도가 떨어진다고 생각하고 이곳저곳을 들려야 물건을 구할 수 있으니 많은 소비자들이 대형마트에 가서 물건을 한 번에 사서 차에 싣고 집으로 가기 전에 푸드 코트에서 식사를 한다.

골목에 그 많던 제과점들은 거의 문을 닫고 대기업 프랜차이즈 제과점들만 남게 되었다. 제과분야는 재벌 따님들의 전쟁터다. 이부진 호텔신라사장은 ‘보나비’라는 계열사를 통해 ‘아티제’라는 커피집까지 영역을 확장했고 정유경신세계 부사장은 조선호텔 베이커리를 통해 ‘달로와요’와 ‘베키아 에 누보’를 운영하고 있다. 장윤선 롯데그룹사장은 ‘포숑’을 정성이 현대차그룹 전무도 ‘오젠’이라는 제과사업을 하고 있다. 재벌 2세 따님들의 빵에 대한 애정이 동네 빵집 사장님들의 애정을 넘어서서 동네빵집 사장님들을 제과영역에서 추방해버리고 있다.

빵집만이 아니라 분식영역도 대기업이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농심은 ‘코코이찌방야’라는 브랜드로 카레사업을 하고 있다. LG는 ‘밥이 답이다’로 분식장사에 나섰다. 치킨 사업에 뛰어든 대기업들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러다가는 삼성 전자치킨과 현대자동차키친을 먹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명품전쟁에 뛰어든 재벌 2세 혹은 3세 따님들의 경쟁이 작년에 한창 이슈가 되었다. 소비재산업을 확장하고 이 속에서 이득을 얻으려는 모습이 선대 경영자들과 다른 모습이라고 하면서 비판의 화살이 날아다녔다. 그래도 이쪽은 영세상인과 경쟁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근 대기업이 영업이익을 확장하는 차원에서 다차원적으로 사업을 확장함으로서 대기업은 영세상인을 목 조르고 있다.

재벌들은 자신들의 돈이 부족한가? 왜 이들은 가족들의 생존이 걸린 이 작은 세계에 까지 발을 들여놓는가? 양극화의 심화 속에서 자영업자와 수출산업으로 구분된 한국의 시장질서 속에서 왜 자영업자의 영역으로 파고드는 것일까? 이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 탐욕(greed)라고 하면 지나친가? 조금 더 가지려는 경제적 이기심은 나와 같이 사는 사람에 대한 고려에 의해서 다소 중화될 수 있다. 그래야 인간적이 된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가 자기 무덤을 파는 것으로 정의내린 것은 자본주의가 가지는 더 많이 가지고 싶은 탐욕이 결국은 자본주의를 망가뜨릴 것이라는 점을 내다보았기 때문이다. 아주 간단히 대기업이 조금 높은 이익을 위해 진입한 시장이 붕괴되면 이들의 구매력이 사라지게 된다. 그러면 사라진 구매력은 다시 재벌들을 시장에서 몰아내게 된다. 이 단순한 논리는 현재의 이익 앞에서 아무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왜? 탐욕이 자기 눈을 멀게 하기 때문이다. 지금 벌어놓아야 한다는 이익 증대에 대한 절박함이 다른 사람들의 생존에 대한 절박함에 앞서는 것이다. 자신이 가진 빵에 대한 애정이 다른 사람이 가진 빵에 대한 애정을 뛰어넘는 것처럼.

그럼 반대쪽은 어떤 것은 느낄까? 재벌이나 대기업의 탐욕으로 자신들의 생계가 불안해진 사람들은? 그들은 불안에서 두려움(fear)으로 옮겨간다. 생존에 대한 막연한 걱정을 넘어서 실패할 수 있고 가족이 붕괴될 수 있으며 자식이 교육을 더 이상 받을 수 없다는 두려움이 생긴다. 그리고 그것이 점차 현실화되는 것을 목격한다. 게다가 영세상인을 위한 상생의 경영이니 재래식시장 살리기니 하는 구호 속에서 자신들의 자존심과 존엄도 짓밟히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분노한다. 두려움에 찬 분노는 완전한 삶에 대한 체념으로 가거나 극단적인 행동으로 나서게 만든다. FTA를 반대하는 농민이나 소값 폭락에 항의하는 축산인이나 학교에서 미래를 못 보는 아이들이나 대학을 졸업하고 자신의 미래가 없다는 것을 걱정하는 취업준비생들 모두 이런 두려움 속에 있다.  

미국에서 1%의 자본주의지배자에 저항하는 항의는 자본주의가 가진 탐욕에 대한 강력한 반발이다. 정치경제학자 칼 폴라니는 환경과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 반드시 뒤따른다고 했다. 월가의 시위와 자본주의에 대한 공격은 이러한 시장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이다. 이것은 자본의 독자 생존에 대한 공존을 향한 외침이다.

탐욕스러운 자본주의를 수정하면서 공존할 수 있는 방안은 없는가? 마이클 포터와 마이클 크레이머는 이 질문에 대해 아주 재미있는 답을 제시했다. 그들은 Harvard Business Review라는 잡지 2006년 12월 호에 “Strategy and Society: The Link Between Competitive Advantage and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라는 논문을 실어서 처음으로 ‘공유가치(shared value)’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그리고 같은 잡지 2011년 1월호에서 ” Creating Shared Value"라는 글을 발표해서 이 개념을 구체화하였다.

이들의 문제의식은 그동안 제시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것이 윤리적이고 규범적으로 접근하였기 때문에 실제 생산성에 기여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기업입장에서 수익을 내면서도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는가를 찾아내는 것이다. 이 문제의식을 확장하면서 이들은 기업이 그동안 가지고 있던 인식의 변화를 주문한다. 즉 사회에 대한 그들의 책임을 비용으로만 인식하고 정부의 규제를 불필요한 간섭으로 받아들이던 자세에서 기업이 사회와 가치를 공유한다는 인식으로 전환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기업은 사회에 대해 더 장기적 생산성과 건강과 환경 등에 기여할 수 있고 이런 기여가 다시 사회의 근로의욕을 고취시키고 건강한 노동과 비용절감을 가져와서 기업의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접근의 가장 창의적인 부분은 사회와 기업을 조화시키면서도 경제적 합리성이라는 측면에서 수익문제를 등한시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구호에 그치면서 기업들에게 책임을 이야기 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다양한 사례를 통해 실제 소비자와 기업이 운영되는 지역민들에게 이익을 만들어주면서 기업자신의 이익도 상승시킬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특히 주주중심의 자본주의를 운영하는 미국에서 단기적 이익에 급급하여 지역주민을 무시하고 소비자의 견해에 아랑곳 하지 않고 단기적 이익에만 급급한 경제운용방식에서 소비자와 지역주민 그리고 환경 친화적인 경영을 하면서도 장기적으로 더 높은 이익을 낸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그들이 제안하는 가치의 공유는 사회와 기업이 절대 다른 존재로 대립적인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관계에 대한 인식전환이 기업과 사회의 공생을 가져온다는 것과 앞으로 미래의 경영방향이 될 것이라는 점 역시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논리에는 더 큰 것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 감정적인 동물이라는 점이다. 공감대의 형성과 동질감이 있고 그곳에서 서로 존중하고 존중 받을 때 더 뛰어난 일을 해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점이다. ‘왕따’와 ‘양극화’로 사회적 경제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이 시대가 원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동질감(sympathy)인 것이다. 경제와 정치가 새로운 영역으로 나갈 수 있는 통로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상생’을 모색하는 한국에 중요한 아이디어를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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