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섭의 정치학-전쟁, 민주주의, 휴머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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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의 정치학-전쟁, 민주주의, 휴머니티
  • 법률저널
  • 승인 2012.01.13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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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 베리타스

육아일기 1)

아이를 키우다보면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생각으로가 아니라 현실로 느끼게 된다. 몇 권의 책 보다 아이 기저귀 한 번 더 갈아본 것이 더 현실적으로 중요할 때가 많은 것 같다. 그래서인지 아이문제를 이야기 하다보면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게 된다. 개인의 경험이 그만큼 중요하기도 하겠지만 아이에 대한 경험이 개인적으로는 놀랍고 신기하기 때문인 것도 그 원인인 것 같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나하면 잘 아프지 않던 나의 딸아이가 감기에 걸려서 최근 몇 일을 고생하고 있다. 평상시에 보채거나 칭얼거리지 않던 아이가 아프니까 울기도 하고 자꾸 칭얼거려서 다른 가족들을 걱정스럽게 한다. 아픈 아이를 보고 있으면 다른 부모들처럼 대신 아파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이의 단순한 감기에도 호들갑을 떠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보면, 앞으로 아이가 좀 더 커나갈 때 부딪치게 될 다른 문제에 과연 이 아이의 부모로서의 역할을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한다. 이제 아이를 키워가는 젊은 세대의 부모들이 대체로 느낄 것 같은 고민은 부모인 나 자신이 아직도 사회를 잘 헤쳐 나갈 수 있는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과연 성장하는 아이를 올바르게 자라도록 방향을 정해주고 이끌어줄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사실 나와 달리 준비된 부모들이 많을 것 같은 게 더 걱정이긴 하다.

아이문제를 꺼내든 이유는 아이문제라고 하는 개인적인 경험이 결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 속에는 중요한 사회적 문제가 있다는 것을 한번 살펴보고 싶기 때문이다. 아이문제의 개인적 부문이 양육의 문제 즉 성장과 건강이라면 사회적 부문은 교육의 문제이다. 그렇게 볼 때 자연히 아이문제는 개인적 부문에서 사회적 부문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아픈 아이를 안고 밤을 뒤척이다 보면 천사 같은 아이가 건강하게 잘 자라주었으면 하는 아빠의 마음과 함께 이 아이가 잘 자라서 다른 사람들과도 원만하게 잘 지내고 사회를 위해서 의미 있는 일을 하기 바라는 사회 선배로서의 생각이 든다. 어린이집, 유치원, 초중 고등학교 생활, 대학진학등과 관련된 생각은 아이의 성장 속도와 무관하게 시간을 타고 한없이 날아간다. 그리고 생각의 비행은 교육으로 행하게 된다.

교육과 관견해서 중요한 정치 철학자가 플라톤이다. 플라톤은 정치를 철학과 연관시키고자 했던 사람이기도 하지만 교육을 정치와 이어준 사람이기도 하다. 제도를 만들어 내는 인간에 관심을 가졌던 플라톤은 인간의 교육을 정치에 핵심으로 두었다. 그가 바라본 교육은 물론 일반인들에게 퍼드리기 위한 대중적 교육은 아니었다. 정치에 있어서 지도자가 어떻게 현실을 읽어내고 이를 수정해나가는가 여부가 정치적 변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고 본 플라톤은 지도자의 교육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제시한 철인왕(philosopher-king)은 권력자로서의 왕을 어떻게 교육하여 철학의 전문가인 진리추구자로 만들 것인가, 즉 지식과 권력이 어떻게 연계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그의 해법이다. 

현대 정치에 있어서 교육이 중요한 것은 지도자의 지도력 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정치참여에 있어서도 교육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교육은 미래에 대한 투자이자 미래 그 자체이기 때문에 장래 세대에게 있어서는 그들 세대를 구성하는 구조이기도 하다.

어떻게 하면 좋은 환경에서 아이가 바르게 자랄 수 있을까? 이것은 아이를 가졌거나 앞으로 아이를 가지게 될 부모들의 가장 궁극적 질문이다. 아이의 개인적인 능력이나 성품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 아이를 둘러싼 구조적인 환경들과 제도들이다. 어른과 아이 할 것 없이 그들이 살고 있는 모든 환경과 제도들은 교육적인 기능과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면 위의 질문인 “어떻게 하면 좋은 환경에서 아이가 바르게 자랄 수 있을까?”는 “지금의 환경과 제도들은 아이들 교육에 바람직할까?”로 바뀔 것이다. 이 포괄적인 질문은 대한민국이 현재 아이들 교육에 있어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환경과 제도가 만들어져있고 그렇게 바뀌어가고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아니요!” 라고 말하면 너무 성급한 결론에 도달한 것일까?

냉정하게 우리 현실을 들여다보자. 어렵게 얻어낸 민주주의와 함께 교육도 정치화되어 버렸고 학생들은 진보적 선생님들과 보수적 선생님들 사이에서 지식의 문제를 정치와 연관시켜서 보게 되었다. 아이들이 정치에 개입되는 것 자체의 장단점 여부는 별개의 논쟁으로 하더라도 지식이 정치화되는 것은 아직 여러 현상을 비추어 보고 판단을 내릴 준비가 부족한 아이들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과제임은 틀림없다. 영어 교육에 올인 하는 부모들과 그것을 사회구조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제도들은 어린 아이들의 발음을 위해 수술도 감행하게 한다.

한 달에 180만원에 육박하는 영어 유치원을 보내서 교육 구조의 선취점을 얻으려는 경쟁은 다 같이 뛰어놀고 같이 하는 것의 사회성을 배워야 할 나이의 어린이들을 직간접적으로 가른다. 유치원을 졸업하고 100만원을 오가는 한 달 등록금을 내면서 사립학교에서 공부하고 사설 학원에 다니면서 저녁시간까지 혹사당하는 아이들. 이들은 5학년이 될 때 쯤 해서 특목고 진학을 위해서 중고등학교 과정의 교과목들을 학원에서 배운다. 영어 점수를 위해 초등학교부터 휴학을 하고 친구들과 떨어져 외국으로 나가는 아이들 중 일부는 다시 돌아오지만 일부는 부모들과 떨어져 살아야 한다. 좋은 교육과 언어 습관을 위해 가족 구조를 변형하는 기러기 가족구조는 실제로 인류가 지켜온 가족구조의 파괴처럼 보인다. 중고등학교를 미국의 사립학교에서 다니기 위해서 한 학생당 6,000만원에서 1억 원에 육박하는 돈을 1년에 지불해야 하는 기러기 가족들의 삶은 안타깝기 까지 하다.   

비싼 돈의 문제는 현재 교육제도 문제의 본질은 아니다. 공적인 교육에 대한 불신이 사적인 교육에 대한 새로운 시장을 형성한 이상 이것은 대단히 자본주의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돈 놓고 돈 먹기의 약육강식적 자본주의의 원칙이 교육 구조에 스며들었다고 해서 그것을 왜 교육에 마저 스며들었냐고 묻는 다면 새로운 질문에 봉착한다. “그럼 자본주의가 싫다는 겁니까?”

따라서 교육제도의 문제의 본질은 사적부문을 키우고 그것에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가는가가 아니다. 교육의 공적 부문을 어떻게 사적 부문으로부터 지켜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즉 공적 부문과 사적 부문의 공존에서 공적 부문의 생존이 문제이다. 국가가 미래의 인재를 위해서 어떤 투자를 해서 공적인 수준에서 인적인 인프라를 구축하면서 공적인 제도로서 살아남는가가 핵심이다. 미래 한국의 인재는 1%에서 찾아야 한다는 엘리트적 발상도 이것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99%가 어느 정도 수준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보다 뛰어난 1%를 위해서 노력하고 봉사할 것이다. 우리처럼 자원이 없는 국가에게 미래는 결국 사람에게 달려있기에 인재 육성은 녹색성장보다도 훨씬 중요한 문제이다. 따라서 국가의 역점은 어떻게 하면 전체적인 인적 자질의 확대를 이룰 것인가가 되어야 한다. 특수한 능력을 좀 더 필요로 하는 이들은 사적인 투자를 더 할 것이고 이것은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를 더 끌고 나가 교육의 궁극은 결국 국가의 의무적인 교육제도를 만들고 대학까지 공교육 구조로 흡수하는 북구유럽방식으로 가자고 이야기할 생각은 없다. 사실 처음 육아문제를 끄집어서 교육환경과 제도를 말하고자 한 이유는 교육의 국가시스템화라는 제도 구축보다는 개인들이 지금부터 작게나마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야기 하는데 있었다.

사회현상은 그 사회의 시대적인 정신을 반영한다면 지금 우리는 막장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TV 드라마들로 인해 유행한 ‘막장 드라마’는 우리 시대의 단편을 보여주는 듯하다. 꽃보다 아름다운 재벌 자제분들의 이야기나 재벌가에서 펼쳐지는 불륜과 근친상간적 가족관계들은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지 않는 원칙과 우리시대가 필요로 하는 실용을 적절히 석어가면서 생활의 활력소가 되어있다. 그러나 이런 원색적인 드라마보다도 더 드라마틱한 사회어른들의 모습은 보는 이들의 손과 발을 오그라트린다. 전기톱으로 국회의 문이 부서지고 국회경위들과 보좌진 속에서 무협활극을 하는 국회의원들은 정치에 대한 구태를 그대로 보여준다. 학생들 성적을 부풀리기 위한 교육자들과 촌지로 자녀들을 귀족처럼 키우는 교육자들이 교육의 현장 곳곳에서 아이들과 생활한다. 일부 사회단체에 있는 사회운동가들은 정치권에 발을 들이거나 재벌과의 연대를 위해서 목소리를 높이고 일부 성직자들은 종교와 정치의 연대를 강변한다. 고위직에 오르려는 이들은 인사청문회를 거치면서 다른 사람들보다 얼마나 잘못이 적은가로 열변을 토한다. 

이런 드라마틱한 상황은 올바르고 곧게 자신의 길을 걸어온 분들과 그분들의 원칙을 초라하게 만들거나 눈에 띄지 않게 만든다. 이런 상황은 사람들에게 이 사회에 진정한 어른이 있는가라는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얼마 전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님에 대한 추모행렬은 종교문제를 벋어나 사회의 어른을 만나고 싶은 사람들의 아쉬움과 희원을 반영하는 듯하다.

아이를 키우는 것이 어른의 몫이고 어른은 다시 아이로부터 배운다고 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 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아이를 키우는 이들에게 어른 됨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로부터 배울게 없기 때문일 텐데 이것도 결국은 어른의 몫이다. 그렇다면 국공립대학 제도, 뛰어난 사회의 지도자 같은 것 요란한 것은 집어치우고 그전에 아이를 키우고 아이들의 앞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어른들이 무엇부터 해야 할까를 고민해야 된다. 그래야 우리는 아이들로부터도 배울 수 있다.

각주 1)-----------------
 최근 교육문제와 관련해서 47회에 썼던 칼럼을 부분 수정해서 다시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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