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섭의 정치학-전쟁, 민주주의, 휴머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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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의 정치학-전쟁, 민주주의, 휴머니티
  • 법률저널
  • 승인 2011.11.04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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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수’와 ‘애정남’의 정치학

신희섭 베리타스

우리가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지 알고 싶으면 최근 띄고 있는 프로그램과 그 제목을 보면 된다. ‘나는 가수다(일명 나가수)’와 ‘나는 꼼수다(일명 나꼼수)’가 제시하는 ‘나는 OO이다’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이 그 중 하나이다. 또 다른 하나는 ‘애정남’이라는 프로그램이다. ‘애정남’은 개그콘서트의 한 코너로 ‘애매한 것을 정해주는 남자’의 약자이다.

‘나는 가수다’는 2011년 최고의 제목이다. 이것은 ‘나는 누구일까?’를 묻지 않는다. 그 반대로 ‘나는 누구이다!’라고 이야기 한다. 여기서 ‘나는 누구이다’라는 선언은 두 가지의 의미를 담고 있다. 첫 번째는 나는 “누구라는 것이 자랑스럽다”는 자부심이다. 그리고 이 자부심은 두 번째 나는 “무엇을 하기 때문에 누구라는”것을 정체성이다. 두 번째 이야기를 다시 말하자면 내가 누구라는 것은 내가 본질적으로 누가 되기 위해 무엇을 한다는 것을 담고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적 목적론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적 목적론은 어떤 사물이 그 사물이 되기 위해서는 그 사물의 본질(telos)적 특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말이 길어졌으니 간단히 하면 가수의 ‘본질(telos)’은 노래를 잘 하는 것이다. 만약 가수가 노래를 잘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왜 가수를 하겠는가?

그런 점에서 ‘나는 가수다’는 나는 “노래를 잘 한다는 가수의 본질을 구현하고 있다”와 그래서 “나는 내가 자랑스럽다”를 동시에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왜 최고인가? 가수라는 영역을 빌리자면 내가 본질을 구현하고 있다는 것은 가수의 본질인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반문한다는 점과 그래서 본질을 구현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인정과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사회적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 언젠가부터 가수가 싱어singer가 아닌 엔터테이너entertainer가 되어 버렸다. 가수의 기준은 얼마나 뛰어난 미모를 가졌는가와 각선미와 어린 나이가 중심이 되더니 언젠가는 그것도 시들해져서 초콜릿 복근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도대체 가수가 팔 근육을 만들어서 옆구리에 팔이 잘 들러붙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노래연습보다 체육관에서 몸을 만들어야 하는 것은 가수의 본질에 어떤 것이 요구되기 때문일까?

가수의 특징이 들려지는 것의 영역을 과도하게 넘어서 보여지는 것이 되어버리게 된 것은 시대적인 환경요인이 크다. 현대 사회는 매스컴의 발달로 시각정보가 중요한 이미지 사회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의 기준도 달라졌다. 노래제목처럼 ‘Video Kill the Radio Star'가 되어버린 것이다. 라디오라는 청각에 의존하는 매체에서 텔레비전이나 비디오와 컴퓨터라는 시각에 의존하는 매체로의 발전이 사람들의 인지와 평가기준을 달라지게 한 것이다. 그래서 노래의 본질이 듣는 것에서 보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다시 ’나는 가수다‘처럼 노래를 잘 하는 것이 가수의 미덕으로 돌아온 것이다.

‘나는 꼼수다’를 들어본 적은 없지만 다른 경로를 통해서 얻은 정보로 판단해보면 ‘나는 가수다’와는 다른 콘셉인 듯하다. 나의 이해가 틀리지 않았다면 ‘나는 꼼수다’의 컨셉은 본질을 찾으려는 정체성복원작업보다는 최근 정치에 대한 비아냥거림이 핵심인 듯하다. 몇 가지 폭로성 사실과 이를 통한 기성 정치권에 대한 거침없는 공격이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모든 건설적인 창조는 비판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모든 비판이 창조를 목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나는 꼼수다’는 건설적인 창조로 갈 수 있는 비판을 하고는 있는 듯하고 사람들의 열광적인 관심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하지만 아직 직접 들어본 적이 없는 입장에서 그 목적이 창조를 위한 것인지는 판단할 수 없다.

의도하였건 의도하지 않았건 ‘나는 가수다’와 ‘나는 꼼수다’는 정체성을 구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나는 무엇인가”와 “그들은(기성징치인들) 무엇인가”라는 차원에서 말이다. “목적론상 나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나가수)”와 “목적론상 그들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하지만 그들은 왜 그렇지 않은가(나꼼수)”는 같은 틀에 넣고 보면 ‘나’와 ‘그들’을 구분하게 해준다. 게다가 나와 그들의 구분은 그들이 부정적일 수록 명확해지며 나의 목적과 도덕성이 강할수록 더욱 뚜렷해진다. 이런 경계획정의 작업은 사회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이때 ‘애정남’이 끼어든다. 이 기가 막힌 사회풍자코미디는 사회의 윤활유가 되는 부분을 건드린다. 노약자유대석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임산부사이에서 어떤 순위가 사회적으로 바람직한지나 헤어진 이성친구를 뒤로 하고 언제 다시 연애를 시작하는 것이 허용되는지와 같은 “고민은 하지만 말하기 어려운” 부분을 파고들어서 애매한 것을 정해주고 있다. 이 역시 사회변동(지하철의 대중화와 고령화 사회나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게 되어버린 혼전연애)으로 인해 생긴 변화에 대한 대응방안을 풍자한 것이다.

‘나는 OO다’가 한국사회의 급속한 변동 속에서 나는 누구이며 누가 아닌가라는 경계선 획정이라는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면 ‘애정남’은 사회적 경계획정의 애매한 부분을 정해준다. 현실적인 이야기로 돌아와보자. 주로 현재의 경계선획정은 ‘나는 중산층인가 아니면 88만원세대인가’와 같은 경제적계층화가 중심이 되고 있다. 이것이 나는 진보인가 나는 보수인가라는 정치적 계급화로 나가게 된다. 이때 ‘이데올로기’라는 ‘애정남’이 끼어드는 것이다. 간단하게 나의 경제적 계층이 정치적 입장을 반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경제적 계층화가 계급투표를 하게 만든 것은 산업화가 발달한 1920년대 이후의 서구정치에서도 나타난 기본적인 정치행태였기 때문에 한국의 산업화수준에서 볼 때 이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민주화와 지역문제로 인해 늦추어졌던 계층적 갈등이 이제 터진 것이다.

하지만 이데올로기라고 하는 사고방식의 틀이자 정치적 가치와 정치지향점은 현상을 단순화한다. 우리편이 아니면 그들편 즉 적과 동지를 확연하게 구분하게 해준다. 중간지대에 있는 회색분자를 걸러 내주면서 이들에게 기회주의자라는 딱지를 과감하게 붙인다. 이데올로기는 ‘애정남’의 역할을 충실하게 한다. “그래서 누구편인데?”와 “그래서 누구 찍을 건데?” 이데올로기는 단순화를 위해 극단화를 추구한다. 내가 조금이라도 도덕적이면 상대는 사악함의 끝이 된다. 나와 우리편이 선의 화신인 콩쥐라면 그들은 악의 화신인 팥쥐와 계모가 된다.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그것이 권선징악이라는 한국적 ‘정의’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혹은 우리 후보가 승리하면 눈물부터 나는 것이다. 동화를 해피엔딩으로 완성했기 때문에.

현재 우리는 과도한 이데올로기 시대를 살고 있다. 너무 단순하고 극단적 시대를 살고 있다. 세계경제가 여전히 나쁘고 앞으로도 얼마동안 더 나빠질 수도 있기 때문에 더 강력한 이데올로기의 시대를 살 것이다. 월가에서 보여준 '99% vs. 1%'의 사회가 눈에 띄는 이유이기도 하다. 더욱 우리와 그들의 폭은 넓어질 것이며 더욱 단순화와 극단화가 심화될 것이다.

그런데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 속해있는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그렇게 단순할 수 있을까? 부모의 자식으로 나는 진보적이겠지만 자식을 둔 부모로서 난 보수적일지도 모른다. 내가 선호하는 스포츠와 예술은 창의적일지 모르지만 나는 늘 같은 길을 가지 다른 길로 가는 모험을 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학생으로서 나는 도발적이고 개혁적일지 모르지만 누군가를 가르쳐야 하는 나는 확실하지 않은 것을 이야기 하지 못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공부를 하고 있는 나는 경제적 기준으로 현재 대한민국의 하위계층에 속할지 모르지만 나의 미래에 대한 비전과 자부심과 그것이 가져다 줄 수 있는 명예는 대한민국 상위 1%에 속할 수 있다. 지하철과 버스에서 시민으로서 나는 자리를 양보하는 공동체주의자로서의 시민적 미덕을 갖추고 있지만 예비군복을 입는 순간 나는 무정부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친구들 사이에 나는 짠돌이 짠순이지만 남자친구과 여자친구 앞에서 나는 통 큰 사람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들의 명품욕심에 쿨하게 ‘된장’질 한다고 하지만 내가 가진 명품가방은 나를 폼나게 해주기도 한다. 이처럼 생각한 것 보다 훨씬 더 나는 다양하게 존재한다. 그래서 다양한 나는 여러 부류의 우리들 속에 속하고 여러 부류의 그들을 만나는 것이다. ‘존재의 다원성’에 ‘공존’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지금 시대는 이데올로기적 단순화와 투쟁의 시대이다. ‘다양한 나’와 ‘다원적인 우리’와 ‘관계된 그들’이라는 존재의 다원성에 대한 인식이 다음 시대를 맞이할 열쇠이다. 공존과 연대의 시대는 여러 가지 다름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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