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섭의 정치학-전쟁, 민주주의, 휴머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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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의 정치학-전쟁, 민주주의, 휴머니티
  • 법률저널
  • 승인 2011.10.21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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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궁반점, 알프레드 아들러, 선거

신희섭 베리타스

어느 식도락가의 이야기이다. 이 사람이 전국으로 음식을 찾아다니며 맛보기를 즐겨해서 주변에서 이 사람에 대한 소문이 자자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미식가에게 맛 집을 추천받기도 하고 이 양반에게 좋은 명소를 알려주기도 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와서 자기 고향인 경상도 봉화자랑을 했다. 봉화에 가면 전국 최고의 야기우동을 만드는 집이 있다는 것이다. 어찌나 자랑을 하고 묘사를 잘하는지 미식가는 다음에 꼭 들려서 먹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야끼우동을 만드는 집이 중국집이라는 것도 식도락을 즐기는 이 양반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내륙지방에 중국집에서 일본식 야끼우동을 한다? 잘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었다. 

시간이 얼마 정도 지난 후에 경상도에 갈 일이 생기자 이 식도락가는 지난번에 들은 봉화의 음식점을 떠올렸다. 그래서 중국집이 있는 봉화읍을 찾아갔다. 때마침 찾아간 날이 장날이라 음식점이 있는 시장은 시끌벅적했다. 중국집은 꽤 오래되어 보였고 그 안은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북적였다. 구석 한가운데 자리 하나를 잡고 앉아서 주변을 보니 음식점의 역사가 제법 되어 보였다. 그리고 홀 저편으로 주인장으로 보이는 분이 메리야스바람으로 밀가루 반죽을 하고 반죽덩어리를 연신 치면서 면을 만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계속 때려대는 면반죽으로 온몸은 땀투성이고 이마에 맺힌 땀방울은 이리저리 튀기까지 했다. 그런데 주인장의 면을 때리는 모습이 너무 열정적이어서 땀방울이 떨어지는 것이 전혀 불결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간신히 주문을 했다. 너무 복잡한 터라 야끼우동은 주문할 엄두도 못내고 주위사람들과 함께 자장면을 주문하였다. 옆에 앉으신 어르신들은 장에 나와서 물건을 팔기도 하고 물건을 사기도 하는지 보따리 보따리를 끼고 계셨다. 야끼우동을 맛보지 못해 아쉽기는 했지만 주문한 자장면을 먹으면서 다음에 다시 오리라고 마음먹었다. 자장면의 맛이 너무 훌륭했기 때문이다. 면의 탄력은 더할 나위없이 좋았고 큼직하게 썬 감자와 고기가 예전 짜장에서 나던 장맛에 석여서 면과 훌륭하게 어울렸다.

음식을 먹으면서 앞을 보니 바로 앞에 경쟁가게가 있었다. 허름한 가게 안에는 손님은 없이 배달된 신문이 어지럽게 놓여있었고 가게 앞에는 오토바이가 두어 대 있었다. 바쁜 장날에 손님은 없고 오토바이만 있는 것으로 봐서는 이 집은 배달을 주로 하는 집이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않을 자리가 없는 이집과는 도저히 비교할 바가 안 되니 경쟁자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런 유명 맛집 앞에 떡 하니 자리를 잡은 것을 보니 건너 편 가게의 주인장 기개는 높이 살만하겠다 싶었다.

미식가가 찾아온 집의 이름은 ‘용궁반점’이었다. 내륙지방에서 중국집이름으로 참 특이했다. 도대체 용궁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용궁리가 주변에 있나? 해산물 전문 중국집인가?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야끼우동을 잘하는 중국집에서부터 심상치 않았던 집인데 이름도 보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길 건너 경쟁 중국집의 간판을 보았다. ‘양자강.’ 얼마나 평범한 이름인가? 전국중국집 이름 중에서 흔한 정도로 따지면 1등이나 2등을 할 이름 아닌가? 하지만 이 지방에서 저 유명한 용궁반점의 주방장인 용왕님에게 대항하기에는 힘에 부치는 이름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식도락가에게 다시 봉화를 갈 기회가 생겼다. 아니 그런 기회를 만들었다. 이번에는 꼭 야끼우동을 맛보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봉화의 용궁반점으로 향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장날도 피했고 시간도 적당해서 야끼우동을 맛볼 수 있었다. 야끼우동의 맛이 참 좋았다. 그런데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보니 길 건너 경쟁음식점에 변화가 있었다. 인테리어를 다시 해서 깨끗해진 실내에는 손님 몇 사람이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용궁반점을 상대하기위해서 인지 제법 힘을 준 모습이 역력했다. 그런데 이런 변화는 실내장식만이 아니었다. 이 집의 간판에는 새로운 이름이 걸려있었다. 경쟁음식점의 주인장의 오랜 시간에 걸친 고민을 그대로 담아내는 상호가 거기에 적혀있었 던 것이다. ‘용궁’반점의 용왕님에게 승부수를 띄우기 위해 그 주인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였을까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이름이 있었던 것이다. 그 이름은 바로 ‘펭귄반점’이었다.

대한민국의 누가 중국집이름으로 ‘펭귄’을 쓴 단 말인가? 중국지명도 아니고 중국음식에 들어가는 재료도 아닌 펭귄. 아니 중국집뿐 아니고 도대체 어느 음식점에 이 귀엽고 앙증맞은 펭귄을 상호로 쓰겠는가? 펭귄 횟집. 왠지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회를 먹을 것 같지 않은가? 펭귄일식. 펭귄머리조림이라도 나올 것 같은. 하지만 이 집 주인은 ‘용궁’의 ‘용왕님’에게 너무나 재치 있게 대응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용궁반점의 야끼우동을 먹고 나서 한번쯤은 펭귄반점의 군만두를 먹어보고 싶지 않은가! 자신이 부족한 부분을 위트로 극복하려는 펭귄반점의 주인을 한번쯤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인간은 누구나 다 부족하다. 부족하지 않은 사람은 신이거나 부족하다는 생각을 못하거나 안하는 사람이다. 신이 아닌 이상 부족하지 않은 인간은 없다. 그러나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지 못하거나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도 있다. 부모의 재산이 모자라서 또는 부모의 애정이 모자라서 자신이 부족하게 되었다거나 사회가 자신의 재능을 알아주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처지가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부족함을 감추기 위해 부모와 자기 주변사람과 사회를 적으로 여기고 적대감을 나타낸다. 이것이 ‘열등감 콤플렉스’이다.

열등감과 열등감콤플렉스는 구분될 수 있다. 개인 심리학을 창시한 알프레드 아들러(A. Adler)는 열등한 조건의 인간이 어떻게 열등감을 극복하는지 혹은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는지를 치열하게 연구한 사람이다. 그는 신체의 일부에 장애가 있거나 기능이상이 생길 경우 다른 신체의 기능이 발전하는 것에서 착안하여 인간의 열등감과 그에 대한 극복을 설명하였다. 베토벤은 청각장애를 이겨냈는데 이것은 신체기관의 열등을 극복하고자 하는 ‘보상(compensation)’에 의해 가능해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타고나기를 열등하게 타고난다. 인간은 동물 중에 유일하게 조산을 한다. 가장 긴 유아기를 거친다. 부모의 보살핌이 없으면 인간의 아이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인간은 추위를 이겨낼 체모도 없고 다른 동물에 방어할 무기도 없이 태어난다. 하지만 이런 열등한 생물적 조건은 인간에게 이것을 극복하여 더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 것이다. 다른 인간과의 공동체 속에서 자신의 인생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으로 인간이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있다면 인간은 열등한 조건이지만 열등감 콤플렉스를 가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열등감콤플렉스에 갇히고 마는 것이다.

봉화읍이라는 작은 사회에서 ‘용궁’반점이라는 막강한 음식점에 대항하기 위해서 주인이 내세운 ‘펭귄’이라는 상호는 상대를 헐뜯지 않고 같이 살아가면서 지역주민들에게 웃음을 주었을 것이다. 기막힌 유모감각으로 외지사람도 한번쯤 ‘펭귄’반점에도 들려보고 싶고 ‘용궁’반점에서 들려보고 싶게 만든다. 그래서 두 음식점은 봉화에 갈일이 없는 사람에게도 한번 들려보라고 손짓을 한다.1) ‘상생’의 묘미.

요즘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두고 나경원후보와 박원순후보의 경쟁이 치열하다. 제도권정치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진 가운데 ‘보수 vs. 진보’경쟁구도에 ‘제도권정치 vs. 비제도권정치’의 축이 가세하였다. 거기다 박원순후보에 대한 학력과 병역의혹과 나경원후보에 대한 친일논란으로 인물에 대한 평가전까지 가세하였다. 제도가 뒷받침 해주지 못하는 한국정치구조에 인물에 집중하는 것이 어쩌면 가장 합리적인 판단인지 모른다. 그리고 누구 하나 뚜렷한 대안제시나 비전제시가 안 되는 상황에서 누구의 도덕성이 더 나은가에 대해 고심하는 것 역시 합리적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선거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우리는 “누가 더 좋은 후보인가?”보다 “누가 덜 나쁜 후보인가?”로 향해하고 있다. 누가 더 문제가 있는가의 복마전속에서 제도정치에 대한 관심뿐 아니라 인물정치에 대한 관심도 사그라지고 있다. 한국정치에 ‘용궁’정치를 이야기 하면 ‘펭귄’정치로 맞받아 칠 수 있는 사람들은 언제 기대해 볼 수 있을까? 웃으며 열등감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정치는 다음 시대를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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