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섭의 정치학-전쟁, 민주주의, 휴머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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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의 정치학-전쟁, 민주주의, 휴머니티
  • 법률저널
  • 승인 2011.09.23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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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 갈림길에 서다.

신희섭 베리타스

안철수 신드롬이 지났지만 시민사회의 속편들이 줄줄이 등장하고 있다. 진보입장에서 박원순 변호사가 보수입장에서는 이석연전 법제처장이 서울시장보궐선거에 출마를 선언했다. 드디어 장외투쟁을 하던 선수들이 무대에 올라왔다. 그리고 안철수이후 급속도로 사그라지던 정치에 대한 관심이 재점화되었다.

개인적으로 박원순 변호사도 알지 못하고 이석연 변호사도 알지 못한다. 따라서 개인적 분석을 할 정보도 없고 그렇게 시민사회의 아이콘이 되신 분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다. 당연히 이 분들과 이분들 주변들과 일면식도 없다. 하지만 나는 이번 주에 칼럼을 이분들을 포함한 시민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다. 이번시간에 다룰 것은 입지전적인 개인으로서 이 분들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새로운 아이콘을 포함한 거대한 제도로서의 시민사회와 정치적 토대이자 정치적 공간이자 집단으로서 시민사회를 다룰 것이다.

한국의 시민사회는 눈부신 발전과 빠른 쇠락을 거듭해왔다. 1980년대의 이른바 386세대로 상징화되는 학생과 민주화를 위한 재야단체들 이전에도 한국에는 1960년 4.19혁명을 통해서 민주주의 투쟁을 이룩한 시민사회가 있었다. 1948년의 국가건설이후 12년만인 1960년에 민주화를 이룩한 이들이 있었지만 그 이후 시민사회가 활성화되고 제도화되기 어려운 시대를 지나게 되었다. 그러다 1970년대 말과 1980년대에 들어와서 독재타도를 외치면서 재분출되었다. 1987년 ‘서울의 봄’으로 지칭되는 민주화이후 시민사회인사들인 김근태,이해찬, 김문수, 이재오등이 정치권에 영입이 되었다. 1990년대 들어와서 사법개혁과 국회감시등을 위해 경실련과 참여연대 등이 제도화를 이루면서 시민사회가 성장했고 2000년 낙천 낙선운동으로 그 정점을 찍었다. 2000년의 16대 총선에서 60%이상의 낙선율을 보이면서 세를 과시한 시민운동의 힘은 2004년 17대 총선에서 시민단체들의 분열 등으로 영향력이 급감하게 되었다가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협상문제를 계기로 촛불시위로 다시 한번 재도약하였다.

위의 역사적 경로를 살펴볼 때 2011년 진보와 보수의 두 진영에서 박원순과 이석연으로 상징화되는 정치권의 진입은 시민사회의 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장을 만드는 것이다. 시민사회는 그간 ‘저항의 논리’의 중심축으로 있었다. 반독재와 민주주의의 창출, 공정선거운동과 낙천낙선운동, 쇠고기 수입반대 등은 기성 정치권이 정책과 정치운영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시민의 날카로운 저항의식을 키웠고 정치권을 견제했다. 과거 1980년대 말 민주화달성이라는 공로로 훈장을 달듯이 정치권에 영입되었던 재야인사로서가 아니라 현재 시민사회세력의 정치권진입은 시민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점에서 응답적인 것이다. 그리고 기성 정치권에 대한 시민들의 거부와 불신을 새로운 세력에 의해서 새로운 방식으로 이루어보겠다는 점에서 거부의 논리와 함께 창조적인 논리를 내포하고 있다.

여기까지가 좋은 이야기이다. 이제 안 좋은 이야기를 해보자. 시민사회의 정치권진입에 대해서 논란이 많을 수 밖에 없다. 시민사회를 ‘제 3의 영역’이나 ‘제 3의 섹터’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행정적 권력이 작동하는 공적공간과 시장적 권력이 작동하는 사적 공간과 구분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전통적인 관점에서 시민사회는 공적공간의 권력을 찬탈하려고 하지 않아야 하며(비찬탈성) 사적영역에서 이권을 기웃거리지 말아야(공익성)한다. 이런 조건이 충족되어야 제 3의 공간으로서 자율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이 현상은 어떤가? 시민사회가 정치세력화 하여 공적공간을 점유하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시민사회의 서구적 최고의 지향점인 ‘중립성’이 무너지는 것이다. 반대의 주장도 있다. 위의 논리에 대해 시민사회에 정치적 가치와 가치 구현을 위한 결정권을 부여하지 말아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점을 들어 비판을 하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에서 끈질기게 민주화를 요구하고 민주주의를 각성시킨 것은 학생을 중심으로 한 시민사회였기 때문에 유럽식으로 시민사회가 자신의 사적 재산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과는 달리보아야 한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즉 유럽식 시민사회 이론이 한국에 그대로 적용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유럽식 논리대로 “정치는 정당에 새로운 사회운동은 시민사회에” 넘기는 분업구조가 한국에는 통용되기 어렵다.

한국 사람들은 정치를 좋아한다. 안철수라는 사람에 대한 지지도가 급격히 증가한 것이나 미국산 쇠고기수입문제를 보라.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가? 택시만 타도 우리는 정치에 대한 과잉관심에 시달린다. 그러나 기성정치인과 기성정당은 싫어한다. 한국유권자중 무당파층이 40%를 넘는다. 정당에 지지도를 알아보는 또 다른 지표로 당비를 내는 진성당원수를 보자. 한나라당 20만, 민주당 6만, 민주노동당 3만 4천, 진보신당 1만 3천, 자유선진당 3천2백, 창조한국당 1천, 친박연대 15명 순이다. 정당정치가 발전한 독일의 경우 사회민주당만 진성당원이 78만 명인데 우리나라의 정당들 전체 진성당원이 32만 명이다.

18대 총선 투표율 46%대는 정치사회에 대한 또 다른 불신의 지표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안으로서 시민사회에 대한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 중심에 시민사회의 아이콘들이 있다. 시민사회의 아이콘을 형성하는 이들은 화려한 개인적 업적과 성과 그리고 기성 정치와는 다른 도덕적 고고함으로 신선한 세력의 이미지를 잘 갖추고 있다. 능력, 도덕성, 이미지의 3박자가 잘 맞아 떨어지면서 급속히 정치사회에 대한 대안으로 부상했다. 대중들의 정치변화에 대한 수요와 정치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새로운 인물이라는 공급이 적절히 맞아떨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과 미국방식의 시민사회의 중립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학교과서로 돌아가자는 것일 뿐이다.

현실을 직시하자. 정치사회가 자기 보신과 자기이익 추구에 매달려서 사회의 변화에 대한 요구를 직시하지 못하면 누가 나서겠는가? 시민사회가 대안이다. 그렇다면 시민사회에 대한 기대가 높고 시민사회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인물들이 있는 현 상황이 시민사회의 정치세력화와 정치적 역량발휘에는 최적기이다.

그러나 시민사회가 지금의 사회적 열기를 반영하여 소기의 성과를 내기에는 넘어야 할 문턱들이 많다. 먼저 시민사회가 네가티브한 ‘거부의 정치’에서 생산적으로 포지티브한 ‘창조의 정치’로 바꾸기 위한 대안의 창출과 현실화의 문턱을 넘어서야 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정책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시민사회의 아이콘을 중심으로 한 자기세력화와 조직화가 필수적인 두 번째 문턱이 될 것이다. 내부에서 의견조율을 하고 반대자들을 설득하거나 굴복하게 만드는 것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조직의 내적 결속을 높여야 한다. 세 번째는 시민사회가 가지고 있는 도덕성에 기대서 가시적으로 너무 착한 정치만을 하려는 ‘신데렐라콤플렉스’를 벗어나야 한다. 이런 콤플렉스는 자신은 선인이고 다른 사람은 악인이라는 구도로 정치를 이해하고 지지자들을 피해자의식하에 끌어 모으게 만든다. 자신들의 정책의 실패가 타정당의 반대 때문이라며 이것을 좌절로 받아들이게 되면 '르상티망(le sentiment)의 정치'가 된다. ‘르상티망’은 열패자들의 사회에 대한 분노만을 담아서 적의감으로 상대방을 거부하고 공격하는 극단적인 투쟁을 하는 것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시민사회자체의 역량으로 갈 것인지 기성정당의 조직을 이용해서 정치를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관문을 거쳐야 한다.

현재 출마를 선언한 시민사회세력은 진보와 보수를 거점으로 기성정당과의 연합을 모색하고 있다. 선거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돈과 조직적 지원의 유혹으로 인해 시민사회의 아이콘들은 정치사회세력과 손을 잡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그들이 장악한 10년”이나 “저들이 장악한 4년을 다시 겪지 않기 위해서”를 내세워 “우리가 뭉쳐야 한다”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진보와 보수가 각각 대통합을 부르짖으며 중도세력의 한사람이라도 더 끌어들이려고 할 것이다. 이정도 되면 이념이고 뭐고 없다. 오리지 표만 존재할 뿐이다.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정부를 거치면서 나온 “그들만은 안돼!”의 재현을 보게 될 것이다.

이곳이 딜레마의 시작이다. 시민사회의 아이콘에게 보내진 지지는 그 사람의 능력과 도덕성과 이미지에 간 지지와 그 사람을 넘어선 시민사회자체에 대한 기대에 근거한 지지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시민사회의 아이콘들이 기성정치체력과 연대를 하게 되면 기성정치세력의 도덕성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과 시민사회자체의 힘을 보여주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이념적 기반을 확고히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들 아이콘에 등을 돌릴 것이다. 그리고 진보의 집권과 보수의 집권에 적개심을 가진 사람들이 대통합의 우산 아래로 모여들어 진보와 보수의 이념의 정치가 아닌 힘을 통한 지배와 저들이 되는 것만 막으면 된다는 거부의 정치를 다시 구현할 것이다. “그들만은 안돼!”라는 ‘르상티망의 정치’가 다시 재현될 것이다. 그러면서 조용히 그러나 급속히 시민사회 자체의 대안가능성에 대한 시민들의 기대와 지지는 ‘르상티망의 정치’에 묘비를 내줄 것이다.

아직도 시민사회는 우리사회의 거의 유일한 희망이다. 우리는 그 희망을 너무 빨리 묘지에 안장하고 싶지 않다.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시민사회여 부디 자신만의 길을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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