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섭의 정치학-변화는 왜 두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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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의 정치학-변화는 왜 두려운가?
  • 법률저널
  • 승인 2011.07.29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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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 베리타스

Can you speak 한국말?

신혼여행을 갔을 때이다. 휴양지 뷔페식당에서 일을 봐주던 청소년급사들과 한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서남아시아 쪽에서 온 17살에서 18살 정도로 보이는 급사 두 사람이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나와 와이프를 보더니 물었다. “Can you speak English?"

순간 기분이 나빠졌다. 간단히 할 줄 안다고 답하고 나서도 기분이 별로 나아지지는 않았다. 기분이 나빠진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먼저 영어대화가 잘 안 되는 나에 대한 짜증. 이들의 영어 발음의 알아들을 수 없음. 하지만 이런 것들 보다 더 컸던 것은 흔히 제 3세계 사람들(물론 서구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 역시 제 3세계지만)이라는 인식 속에 있는 가난한 나라 청소년들에게 “당신 영어는 할 줄 알기는 하는 거야?”라는 질문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만약에 내가 질문을 미국의 어느 식당에 가서 미국 고등학생에게 똑같이 받았다면 어땠을까? 기분이 나빴을 것이다. 영어소통능력의 부재나 발음이해의 어려움은 똑같았을 것이고 어린 것들이 무례하게라는 생각 역시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보다 못한 제 3세계 국가에 국민들에게 질문을 받은 것은 아니니까 여기는 좀 달랐을 것이다. 즉 내가 기분 나빴던 것의 핵심은 조금 깔보고 가는 이들 나라사람에게 그런 질문을 받았다는 것이다.

내가 가장 기분이 나빴던 것의 문제는 짙은 피부색과 낮은 소득수준의 국민들로부터 당연히 인정되어야 할 ‘우리’의 위상이 도전받는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라는 표현을 쓴 것은 이 급사들이 한국, 일본, 중국인들을 많이 경험하고 그에 따라 나에게도 그런 질문을 던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볼 때 한국 사람들은 영어를 잘 안 쓰거나 못 쓰는 것이다. 어쨌든 그들의 질문으로 나는 기분이 나쁜 저녁을 보냈다.

그런데 왜 난 이들에게 모욕을 받았다는 기분이 들었을까?

며칠 전 노르웨이에서 한 인종주의자이자 메시아주의자가 인간살육을 했다. 노르웨이의 노동당캠프에 갔던 청소년들을 찾아다니며 총격을 가해서 살상을 했다. 그리고 언론보도에 따르면 테러 용의자 브레이빅은 이번 사건 며칠 전 1천500쪽에 달하는 '2083: 유럽 독립선언서'라는 성명을 냈고 그 내용을 요약한 12분 분량의 동영상을 인터넷에 게재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전세계를 경악하게 만든 이 사건은 다문화주의의 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알리겠다는 테러범의 정치적 의도가 성공적이게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유럽의 다문화문제에 대해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극단주의의 위험성에 다시 한 번 주목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영향은 한국에도 그대로 파급되었다.

1970년대 이후 학문적으로 유행이 된 ‘다문화주의’는 자유주의에 근간을 둔 이론으로 이주민이 많아진 서구유럽을 설명한다. 다문화주의는 쉽게 말해서 문화는 모두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문화에 대한 상호존중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론이자 정책방안이다. 따라서 이민과 이주자들이 많아진 서구 사회에서 토착국민과 이주민 사이에 상호 문화를 존중하면서 동등한 입장에서 정치사회공동체를 만들자는 것이다. 유럽의 인구 감소와 사회적 유동성의 증대로 그리고 새로운 인재 유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나라의 사람들의 유입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이들이 사회의 주변인이 아니라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동등하다는 인식을 가지게 만들겠다는 취지에서 ‘동화정책’이 아닌 ‘다문화정책’을 실시한 것이다. 그런데 이 다문화주의가 실패했다는 공식적 발표가 최근 급증하고 있다. 2010년에 독일의 메르켈 총리와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과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다문화주의 정책이 실패했다고 발표했다. 그 이전인 사례도 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1973년부터 백호주의를 버리고, 다문화 정책을 실시했으나 2005년 이슬람 청년들의 난동 이후 사회갈등이 심각해지면서 2007년 하워드 총리 시절 ‘다문화 정책 실패’를 선언한 뒤 폐지했다.

이번 사건으로 한국의 언론도 다문화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신문 뿐 아니라 인터넷에도 다문화에 대안 논쟁이 뜨겁다. 특히 인터넷에 가면 ‘다문화주의 망국론’과 ‘다문화주의 열등론’이 격렬하게 다툰다. 정부와 지식인사회와 몇몇 시민단체는 다문화주의를 선진국으로 가는 담론으로 이야기 한다. 반면에 한국적 공동체와 문화를 강조하는 이들과 단체 그리고 지식인들은 다문화주의의 현 상황을 보라고 한다. 범죄율과 결혼증가와 이주노동자문제 등의 지표들이 인터넷 전장터에서 뜨겁게 싸우고 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끔찍한 사건들을 목격해왔다. 그리고 그 사건들의 중심에는 미치광이가 되어버린 이들과 자신이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보았다. 일본의 옴진리교가 그랬고 오사마 빈 라덴이 뉴욕에서 비행기로 테러를 할 때 그런 장면을 목격했다. 훨씬 더 전에 유태인을 유럽에서 몰아내겠다던 히틀러를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 사건 뒤에는 사건의 재발방지와 대책이 이야기 된다. 이번 노르웨이의 사건 역시 다문화주의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를 알려준다.

그렇다면 노르웨이의 테러범 브레이빅은 왜 분노하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 분노는 왜 체계적인 살육을 하고 그런 살육의 명분을 알리기 위해 1500페이지나 되는 성명서를 만들게 하였을까? 그의 범죄를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그리고 어떤 명분으로도 인간 살육은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런데 다문화주의를 잘 들여다보자. 다문화주의를 우리는 이성적으로 받아들이라고 이야기를 듣는다. 다문화주의 이론가들은 ‘관용’과 ‘인간의 자유’를 가지고 보편성을 이야기 하면서 설득한다. 이런 관점에서 정부는 정책을 만든다. 그렇지만 과연 정치가 이런 이성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인가? 정치는 이성의 투쟁이자 감정의 투쟁이다. 인간 욕구의 투쟁의 장이 바로 정치이다. 그런데 다문화주의는 이성을 통해서 우리의 감정의 영역인 문화적 선호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그렇게 해서 한 나라 안에 여러 종족들이 다양하게 공존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울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종족과 언어 그리고 문화에 대한 감정의 영역이다. 마치 내가 신혼여행지에서 서남아시아 급사에게서 받은 것과 같은.

이성적으로 다문화주의를 받아들이자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문화적 유행인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식인 세상에서 멀어지는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은 위험하다. 그런 이성적 다문화주의는 항상 정치의 앞면인 감정의 영역을 경시하게 한다. 외국인 노동자와 직접 경쟁을 해야 하는 일용직 노동자들과 외국인 부인과 남편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학교에서 다문화아이들과 마주치는 아이들이 모두 다문화주의 이론가 킴리카(Will Kymlicka)처럼 점잖게 다문화주의를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 그들에게 다문화는 치열한 삶의 투쟁공간이다. 그리고 이들의 감정과 욕구 인정받고 인정하고 싶은 이 공간속에 이성이 들어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 투쟁에 장에 있는 (한국)사람들은 새로 이주해온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지 않을까? “Can you speak 한국말?” 즉 “한국말은 좀 할 줄 아니?”

우리의 정치는 현실 투쟁의 공간 속에 있는 ‘사람들’의 감정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왜 한국인들이 분노하는지 그리고 왜 이주해온 사람들이 분노하는지를 알 수 있다. 머리 말고 가슴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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