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회 사법고시 이색합격자]"법조인이 되기 위한 첫 발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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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회 사법고시 이색합격자]"법조인이 되기 위한 첫 발일뿐
  • 법률저널 편집부
  • 승인 2003.01.13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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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서울대 卒
1. 들어가며


'다시는 고시공부를 하고 싶지 않다'
 
길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는 4년여의 수험기간을 이제 마감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올 2차시험 마지막날 형사소송법을 치르고 나오면서 든 생각이었다. 나보다 더 힘들게 공부한 사람도 많겠지만, 나로서도 수험기간 내내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가슴 졸여야 했다. 나이 들고 직장을 다니다가 뒤늦게(?)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는 딸린 가족들에게서 위안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합격해서 합격기를 쓰는 날이 오기를 기대했지만, 막상 쓰려고 하니 왠지 쑥스럽고 실제보다 과장되거나 미화되지 않을까 조심스럽다. 평범한 한 고시생의 수험기라고 생각하고 읽어 주었으면 한다.
 
2. 실패와 재도전 
  
올 12월 3일 사법시험 2차 합격자 발표가 나고 명단에 내 이름과 수험번호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안도의 한숨과 함께 작년의 악몽(?)이 스쳐 지나갔다. 작년 기득권으로 시험을 치르던 때 스터디를 함께 했던 후배들은 모두 합격을 한 반면, 나 홀로 실패의 쓴잔을 마셨던 것이다. 그 때의 충격은 굉장해서 나의 진로에 대한 회의와 함께 과연 사법시험을 계속 준비할 것인지 결단을 내려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1주일 정도의 숙고기간을 거쳐 내린 결론은 마지막으로 1년만 더 공부해 보자는 것이었다. 일단 공부를 재개하면서 실패에 대한 원인분석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2차 시험의 실패는 첫째 컨디션 조절실패, 둘째 기본서를 등한시 한 점, 셋째 답안작성요령의 부족으로 결론 내렸다. 컨디션 조절실패의 교훈은 작년 2차 시험을 목전에 두고 심한 감기몸살에 걸려 4일 내내 열을 내리게 하는 주사를 맞아 가면서 시험을 보아야 하는 상태에서 시험을 치렀기 때문에, 시험을 앞두고 건강관리에 매우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두 번째 상법, 행정법 등 일부과목의 경우 기본서를 외면하고 요약서를 중심으로 공부를 한 것인데, 회독수를 늘리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기본적인 법리파악이 부족한 상태에서 시험을 보게 되어 결과적으로 실패의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세 번째로 답안에 기술해야 할 부분과 그러하지 않아야 하는 부분을 명쾌하게 정리하지 못한 상태가 문제였다.


이러한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고 나니 2차 시험을 준비함에 있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직면하게 된 문제는 1차 시험의 합격이었다. 2000년 1차 합격이후 다시 한번 난제에 부딪힌 것이다. 객관식 문제를 잘 풀 수 있을까 처음에는 걱정이 컸으나 1차 준비를 해보니, 2차 시험을 준비하면서 쌓은 지식이 많은 보탬이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1차 시험에 대비해서 80여 일이 남아 있었다. 공부전략을 어떻게 짤 것인가 고심하다가 어차피 동차를 목표로 해야 하므로 기본서를 꼼꼼히 읽기로 했다. 일체의 강의나 요약서를 배제하고 각 과목별로 저명하신 교수님의 교과서를 정독하기 시작했다. 민법(김형배), 헌법(권영성), 형법(취약과목이었기 때문에 임웅 교수님의 교과서를 일독하고 이재상 교수님의 저서를 정독했다)을 일독하고 나니 1월초가 되었다. 상대적으로 속독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기간은 40여 일. 과목별로  한 권의 두꺼운 문제집(헌법 황남기, 민법 김형배, 형법 이재상)을 헌 책방에서 구입했다. 일일이 풀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답을 미리 표시해 놓고 틀릴 만한 지문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시험 전날 봐야 할 지문을 간추릴 수 있었다. 2월 중순에 경제법(박도하)을 테이프로 듣고 문제풀이 했다. 영어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는 과목이었고, 달리 준비할 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시험날짜에 임박해서 2-3일간 문제집(신성일)을 풀었다. 시험 며칠전 전국모의고사 3회분을 구입해서 풀어 보니 상위 10%내에 포함되어 자신감이 생겼다.


1차 시험을 치고 나서 채점을 해보니 평균 89점이 나와서 곧바로 2차 준비에 들어갔다. 6월 시험에 대비해서 시간적인 여유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학원 강의는 일체 생략하고 학원모의고사만을 보면서 답안작성요령을 체득하려고 노력했다. 3월부터 6월초까지 7과목의 시험을 치르면서 나름대로 답안을 이렇게 작성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우선 문제점을 명쾌하게 지적하려 노력하면서 관련 법조문, 상호 충돌하는 법 이론을 간명히 적기로 했다. 다음으로 판례와 학설을 소개함에 있어 판례에 비중을 두기 위해 판례의 핵심적인 용어를 표시해 두고 암기했고, 학설은 최대한 간단히 소개하기로 했다. 끝으로 사안의 해결은 풍부하게 쓰되, 나의 결론이 타당하다는 점을 최대한 부각시키기 위해 고심했다. 


3. 사시에 도전하기까지


지난 4년여간의 수험기간은 내 생에 있어 가장 힘들고 절박했던 순간들이었다. 비법학도인 내가 처음 사법시험을 하겠다고 했을 때 아내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은 한결같이 경악하였다. 과거 고시를 했던 것도 아니고 관련과목을 공부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내심 자신(돌이켜보면 무모할 정도의 자만이었던 것 같다)이 있었기에 과감히 사법시험을 준비할 수 있었다.


과거 스스로 내 자신이 사법시험을 준비하게 되리라고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고3때 대학교 진학을 앞두고 중, 고등학교 선생님이 잘 어울린다는 주위 어른들의 권유로 사범대학에 가게 되었다. 대학교 3학년을 마치고 짧은 군대생활을 하고 나서 복학 후에는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고, 기자가 되어 몸으로 직접 사회를 체험해 보고자 하는 욕구가 생겼다. 주위에 이른바 '언론고시'를 준비하는 친구들이 없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정보를 수집하여 혼자 공부하기 시작했다. 공부를 시작한지 6개월 정도가 지날 무렵, 우연히 아버지가 가져오신 신문에 난 공채공고를 보고 시험삼아 응시했다. 뜻밖에 최종합격을 하게 되어 4학년 2학기를 거의 결석하다시피 하면서 신문사에 출근하게 되었다.


이러한 기자생활이 근 10년에 이르게 된 97년 경영상태가 어려워진 신문사가 구조조정을 하게 되었다. 나도 '블랙리스트'에 올라 다음해 1년간의 휴직을 하게 되었다. 원치 않는 휴직을 하면서 다시 한번 장래진로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어차피 쉬는 시간이니까 색다른 뭔가를 해 보아야겠다고 다짐하고, 사법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아내에게는 1년 동안만 취미 삼아 하겠다고 하여 달랬다. 사법시험을 처음 준비하다 보니 무슨 과목을 공부해야 하는지 몰라서 인터넷을 뒤지고, 학원 관계자(98년 초 종로행정고시학원에서 헌, 민, 형법을 1달씩 들었다)에게 묻기도 했다. 막상 공부를 시작하고 나니 재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계속 공부를 해야겠다고 내심 결정했다.


4. 꿈을 이루다


99년 2월 사표를 내자 주변사람들의 우려는 기대이상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사법시험 합격의 꿈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었다. 집에서 신림동까지 왕복하면서 열심히 공부했다. 코피는 안 났지만 수면부족으로 얼굴은 까맣게 타 들어가고 있었다. 99년 2월에 본 1차 시험은 기대와는 달리 낙방. 실망하는 아내를 다독이면서 한번 더 1차에 도전하기로 했다. 다행히 2000년에 1차에 합격하였고, 2차 준비에 들어갔다. 그해 7월말에 스터디에 가입하게 되어 10살 가까이 차이나는 후배들과 2001년의 합격을 목표로 공부를 하게 되었다. 스터디원은 바뀌었지만 다음해 2차 시험 직전까지 스터디는 계속되었다.


고대하던 2001년 6월의 2차 시험. 갈고 닦은 실력발휘를 위해 시험장소인 한양대 부근 관광호텔에 숙박한 것이 문제였다. 화요일부터 시작하는 2차 시험을 위해 일요일 오후 호텔에 체크인하기 위해 가는데 초기 감기기운이 있는데다가, 혼자서 무거운 짐을 옮기느라 무리했다. 호텔 방에 도착하자 몸살기운이 엄습했다. 곧 괜찮아질 것으로 생각하고 시험준비를 하다가 일찍 잠에 들었다. 그 다음날 아침부터 몸이 말을 듣지 않기 시작했다. 감기와 몸살이 한꺼번에 찾아 든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집에 전화를 걸어 아내를 호텔로 오게 했다. 병원에 가서 진료를 해 보니 심한 감기몸살이었다. 휴식이 최선이었지만 내일부터 시험이 시작되기 때문에 쉴 수 없는 형편이었다. 링겔주사를 맞고 종일 호텔침대에 누워 있었다. 시험기간 4일 내내 새벽에 인근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아야 했다. 그렇게 4일간의 전투 같은 시험이 끝났다.


5개월 여의 지루한 기다림 속에서 내심 꼴찌로라도 합격하기를 희망했음에도 합격자 발표 명단에는 스터디를 함께 했던 후배들의 연속된 번호가 있을 뿐 내 수험번호는 증발해 버리고 없었다. 그 사실이 너무 슬퍼서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절망뿐인 며칠을 보내고 진짜 마지막으로 '운명(?)'에 도전해 보기로 했던 것이다. 올해는 오히려 홀가분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했고, 다행히 합격을 할 수 있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5. 새로운 출발을 향해


춘추관의 이민수 원장님은 내가 처음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때부터 공부장소 제공, 수강료 할인 등 여러 가지 편의와 상담, 조언을 해 주셨다. 특히 작년에 내가 사법시험을 그만 두려고 할 때 다시 한번 더 도전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셨다. 전 태학관 강경헌 원장님은 98년 9월 내가 신림동에 올 때부터 무료로 독서실을 이용하게 해 주셨다. 정신적, 물질적으로 많이 도와주신 두 분께 깊이 감사드린다.


1차 공부할 때 함께 했던 선기, 관섭, 용섭이도 하고자 하는 일에 좋은 결실을 맺기 바란다. 2차 공부할 때 함께 고생한 만순이형, 상훈이도 내년에 합격하기를 바란다. 준한, 정훈, 상철, 기창, 성원, 제석, 승진, 정희도 내년에 합격하길 빈다. 군에 간 석환이에게는 합격의 축하인사를 보낸다. 이외에도 신림동에서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많은 사람들이 빨리 소망을 이루었으면...


내가 공부하는 동안 곁에서 고생한 사랑하는 아내와 동휘, 동주에게 큰 고마움을 느낀다. 누나들, 처가 식구들에게도 그동안 걱정하게 한 점 죄송스럽다. 그리고 하늘나라에서 못난 자식을 늘 걱정해 주시는 부모님께 늦었지만 조그만 선물을 드리는 것 같아 마음이 뿌듯하다. 


이제는 사법시험의 합격자 수가 1천명에 이르렀다.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부와 명예로의 급행열차가 아니다. 법조인이 되기 위한 첫 발을 내딛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점을 스스로에게 일깨운다. 연수원에서의 2년간의 생활을 거쳐 2005년에는 새내기 법조인으로 새 출발을 한다. 고시공부 하던 기간 중 체득했던 절실한 목표, 그에 이르기 위한 지난한 노력, 주위 사람들의 도움과 정성을 가슴속에 고이 간직하여 항상 '깨어 있는' 법률가가 돼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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