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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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습관'
  • 한비야
  • 승인 2003.01.08 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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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야/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여행가


7년간의 세계일주 등 오랜 `유목민 생활’을 마치고 지난해 봄부터 `정착민’으로 살고 있다. 정착한 곳은 서울 신촌 홍대 앞. 지하철이 있어 교통이 편리하고 대학가라 먹거리가 풍부하다. 그러나 이런 편리함보다 더 마음에 드는 건 아침 햇살이다. 동향이라서 햇살이 집안 깊숙이 들어온다. 이른 아침에 화분의 꽃과 잎사귀 위로 비치는 햇살은 마음까지 싱그럽게 해준다. 골수 올빼미과인 내가 일찍 일어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이 아침 시간을 충분히 즐기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해묵은 습관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바뀌겠는가. 처음에는 자명종 3개를 5분 간격으로 맞추어 놓아도 못 일어났다. 궁여지책으로 라디오를 6시에 자동으로 켜지도록 했다. 일부러 동네 떠나갈 듯 볼륨을 높여놓아 켜지는 즉시 끄지 않으면 안되니 저절로 잠이 깼다. 이렇게 서너달 애를 쓰니까 자명종이 하나둘 필요 없게 되더니, 어느 때부터는 자명종이 울리기 전에 일어나기도 했다. 될수록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십수년 묵은 버릇이 이렇게 허무()하게 고쳐진다는 게 놀라웠다.


이상한 일은 전에 살던 언니집에 가면 옛날처럼 늦게 일어난다는 거다. 이걸 보면 근래 내가 일찍 일어나는 건 `몸의 습관’이 아니라 홍대 앞 집과 나와의 `관계의 습관’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일, 혹은 어떤 사람과 어떻게 처음을 시작하느냐에 따라 설정되는 관계의 틀 말이다.


어떤 친구와는 약속만 하면 늦는다. 바짝 신경써도 자꾸 그런다. 비디오 테이프를 돌려주는 일도 그렇다. 지난번 동네에서는 반납 잘한다고 보너스 점수까지 받았는데 이 동네에 와서는 불량회원으로 찍혔다. 처음 몇번 늦게 갖다주다 그렇게 버릇이 든 것이다. 앞으로 빨리 반납하라는 독촉전화 무수히 받을 것 같다. 글 쓰는 일도 그렇다. 시작할 때 마감을 맞춘 곳은 매번 시간을 잘 지키지만 처음 한두번 마감일을 어긴 곳은 번번이 늦는다. 아무리 마음을 굳게 먹어도 소용없다. 의식, 무의식 중에 이미 그런 관계의 틀을 짜 놓아서일 거다.


여행다닐 때도 그랬다. 평소 입도 대지 않는 탄산음료를 여행 초반에 마시기 시작하면, 그 나라를 떠날 때까지 콜라나 사이다를 달고 산다. 첫번째 맞는 일요일에 성당에 가면 그 나라에 있는 동안은 주일마다 꼬박꼬박 성당에 가게 된다.

개별적으로 형성된 `관계의 습관’이 이렇게 무섭다. 그러니 무슨 일이든 처음 시작할 때가 얼마나 중요한가. 아무리 뼈에 박힌 습관이라도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 시작할 때 전혀 다른 관계를 만들 수 있다니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2년 전 베이징에서 어학연수 할 때다. 첫눈이 온 날, 첫눈답지 않게 함박눈이 평펑 내렸다. 그날도 평소처럼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갔더니 중국 선생님들이 모두 혀를 내둘렀다. 눈이 이렇게 많이 오는 날은 위험천만이라 중국 사람도 자전거 타기를 꺼린다면서.


나 역시 그날 아침 어쩔까 잠깐 망설였다. 그러나 곧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오늘 자전거를 타지 않으면 눈 오는 날마다 겁이 나서 타지 못할 거라고. 용기를 낸 덕분에 나는 그해 겨울 내내 눈도 얼음판도 아랑곳없이 자전거를 타고 다닐 수 있었다.


이번 홍대 앞 집에서도 마찬가지다. 불치병이라고 여겼던 밤도깨비 병이 이 집과의 초기 관계를 잘 설정한 덕분에 서서히 고쳐지고 있다. 아침마다 벌떡 일어나지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다른 버리고 싶은 습관들도 이런 식으로 하나씩 없앨 수 있다는 희망의 싹을 보아 기쁘기도 하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좋은 틀을 짠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다. 어디 일뿐일까. 새로운 사람, 새로운 장소, 새로운 시간, 그 어떤 것이라도 처음 시작은 우리에게 기회를 준다. 버리고 싶은 것은 버리고, 얻고 싶은 것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말이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됐다.


(이 글은 한겨레신문에 기고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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