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생의 일기]후보단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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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생의 일기]후보단일화
  • 법률저널
  • 승인 2002.11.27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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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화(外畵)를 보고 있는데, 12시에 발표가 난다는 자막 뉴스가 흘러나왔다. 한 시간을 가슴 졸이면서 기다렸다. 나는 단일화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승리하는 측은 모든 것을 다 가지지만(winner takes all), 패한 사람은 그 동안의 모든 노력이 무(無)가 된다. 예전에 김종필씨가 당선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뻔히 알고도 출마했던 것은 그것을 통해 세를 확보하고 정치적 지분을 행사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단일화에 실패하고 국민들에게 술안주가 되어 씹혔지만 결국 자기 세력을 유지함으로써 정권을 장악한 양김이라는 좋은 예도 있다. 게다가 '경선'을 통해 선출된 후보도 부정하고 뛰쳐나가는 마당에 여론조사라는 방식은 불복하기에 충분한 여러 가지 취약점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이회창 후보의 득표율이 최근 여론 2주간 여론조사의 평균 지지율 아래로 떨어지면 결과를 무효로 한다는 '역선택 방지조항'은 그야말로 결과를 무효로 돌리기 위한 합의인 것 같았다.

 

12시에 발표하기로 한 것이 늦어지면서 '그러면 그렇지'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두 후보 모두 그동안에 쌓아 온 정치적 이미지와 그 분들의 성격에 비추어 보았을 때 내 예측이 빗나갈 것 같다는 기대도 했다. 두 후보 모두 '약속을 해 놓고 지키지 않으면 이제는 국민들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자정을 10분쯤 지났던가? 양당의 협상관계자들이 상기된 얼굴로 들어왔다. 어느 쪽이 승리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결과가 발표되고 환호성과 "무효다"라는 말이 뒤섞여 들려왔다. 승리하기위해 두 당은 최선을 다했다. 내게도 오후에 양측에서 문자메세지가 날아왔다. 일방적인 게임이 아닌 아무도 결과를 예측하지 못하는 승부, 정치에서 그것은 스포츠보다도 더 극적인 것 같다.  

 

결과가 발표난 후 정몽준은 이렇게 말했다.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노후보의 당선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내가 이전에 우리 나라 정치에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던 너무나도 깨끗한 승복이었다. 그 짧은 말 속에 많은 것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가지 이제"하면서 돌아 들어갔다. 나이도 젊고 다음 대선을 바라보면서 나온 고도의 계산된 발언이라고 분석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5년 뒤의 일이고 눈앞에 다가온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날아가 버렸는데 저렇게 말하기란 참 힘들 것이다. 예전에 우리 정치에서 패배한 후보들 입에서 "부정선거"니, "원천무효"니 하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던가? 미국 뉴욕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힐러리에게 패배한 젊은 공화당 후보는 자신의 지지자들 앞에서 힐러리를 칭찬하며 "뉴욕주의 발전을 위해 협력하겠다"고 말했다. 그 부러운 모습을 이제 우리도 가지게 되었다. 정몽준은 이인제와 대비되어 국민들 가슴속에 선명히 남아 있을 것이다.

 

노무현은 이렇게 말했다. "정해 놓은 규칙을 지키는 정치를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국민들이 이런 페어플레이를 보면서 정치인에게 희망을 가지고 위안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정확하게 옮겼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민주당 경선에서 당선되고 난 후, 그 동안의 마음 고생을 "깊이 있고 성숙한 사람이 되라"는 주문으로 받아들이고 "겸손하고 성실한 후보로서 최선을 다하고 싶다"고 말했다. 승리의 기쁨에 들떠 기고만장할 수도 있는데 그는 자신의 승리마저 그 짧은 순간에 객관화시킬 수 있는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지지여부를 떠나서 배울게 많은 사람인 것 같다.

 

이런 결과를 지켜본 한나라당의 반응은 물론 예상대로다. 축하하며 정정당당히 싸워달라고 주문하는 당직자도 있지만, 대부분은 'DJ 정권 후계자 선출을 위한 깜짝쇼' 정도로 폄하하며 맹공을 퍼붓고 있다. 한나라당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 여론 조사라는 방식 자체도 사실은 문제가 있지만, 그것보다도 정책과 이념 그리고 성장배경이 다른 두 후보가 결국 대선승리라는 목적하에 단일화를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한 심판은 본선에서 국민의 몫이다. 그런데 단일화의 과정이 참으로 극적이고 그 결말도 깨끗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 같다. 여러 면에서 아직까지도 우리나라 정치가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한 해 예산안을 몇 십분만에 뚝딱 해치우고, 의결 정족수를 채우지 않고 법률을 통과시켰다가, 문제가 되니까 대리투표를 하는 것 등이 그 단적인 예다. 그러나 이제 후보단일화 같은 사안을 후보들간의 밀실 거래나 흥정이 아닌, 텔레비전 토론회와 여론을 통해 달성하고 있다. 점점 정치가 공개되고 투명해지는 것 같다. 

 

이제 국민의 마음을 얻기 위한 치열한 싸움이 남아 있다. 한나라당은 총선에서 효과를 발휘한 부패정권심판론을 꺼내들고, 이번 대선을 보수와 진보의 구도로 만들어가려 할 것이다. 단일후보측은 국민통합, 세대교체 같은 화두를 들고 나오며, 대선구도를 수구와 개혁의 틀로 짜 나가려 할 것이다. 한나라당이 이념과 노선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연합을 할 수 있냐고 비판할 때, 민주당은 낡은 생각과 정치를 상징하는 세력에 맞서기 위한 연대라고 맞설 것이다. (나는 물론 어떤 입장에 서 있다. 그러나 이 글이 나의 '일기'지만 또한 공적인 지면을 통한 것이기에 요즘 내가 내 처나 친구 후배들과 나누는 그 많은 얘기를 옮겨 놓지는 못하겠다.)

 

'국민경선', 월드컵,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의 참패, 후보단일화까지, 이래저래 이번 대선은 극적인 요소로 가득하다. 우리는 고시생이지만 또한 유권자다. 오늘은 고시촌도 '정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다. 대화를 하든 머리 속에만 머물러 있든 .

/권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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