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소 합격기]"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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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소 합격기]"Soli Deo Gloria"
  • 법률저널 편집부
  • 승인 2008.08.06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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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호 제48회 사법시험 최연소 합격

 

나는 이제 막 스물 한 해 남짓을 살아 온 젊은이다. 아직 배울 것이 더 많고, 깨달아야 할 것이 더 많다. 그런 내가 과거를 돌아보는 글을 쓴다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다. 나는 수험시절에도 그랬듯, 지금도 여전히 허술하고 부끄러운 점이 많은 사람이다. 사법시험에 합격했다고 해서 그런 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의 불완전함을 못내 끌어안은 채로, 또한 희망으로 가득하다. 수험생활, 특히 불합격의 시간들을 겪어 내면서, 나는 도리어 나의 밝은 미래를 믿게 되었다. 이것은 사법시험 합격이 아닌, 나의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내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의 희망이다. 이것은, 결코 꺼지지 않는 희망이다.


나는 과거를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지혜롭지 못하다. 그럼에도 여기에 부끄럽고 불완전한 채로의 나를 남겨 두는 것은, 같은 과정을 겪고 있을 그 누군가에게 미약하나마 도움이 되기 위함이고, 미래의 나를 위해 오늘의 나 자신을 하나의 기준점으로 세워 두기 위함이며, 무엇보다도 지난 수험기간동안 내가 겪었던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이 고민한 끝에, 구구한 공부방법론에 대해서는 쓰지 않기로 했다. 나는 2차시험을 세 번 봤고, 특별한 공부방법보다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공부방법론을 최대한 따르려 노력했던 사람이다. 조금만 노력하면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훌륭한 공부방법론을 많이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이 점에 대해서는 고개 숙여 양해를 구한다.

 

나는 열일곱의 봄에 대학생이 되었다. 중학교를 중퇴했던 건,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무슨 비판적인 성찰의 결과 같은 건 더더욱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특별해지고 싶다는 류의 치기에서 비롯된 일이었다고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2000년 1월, 중학교 2학년의 겨울방학에, 나는 아무런 계획도 준비도 없이 학교를 자퇴했다. 그 날로부터의 1년은 상상하지도 못했던 궤도로 거짓말처럼 흘러갔고, 이듬해인 2001년 3월에 나는 연세대학교에 입학했다. (그 1년간 내게는 중요한 일들이 많이 있었지만 여기에서는 일단 생략하기로 한다.)


살아가다 보면, 정말 중요한 일들은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진행되고 결정되어 버린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것은, 내게는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영역으로 생각된다. 나는 아직 하나님의 뜻을 다 알지 못하지만, 그 1년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하나님의 인도와 개입을 강하게 느끼고 있다. 그건 내가 내 손으로 해냈다고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대학교에서 2001년과 2002년, 10대의 후반기를 보냈다. 모든 것을 온 몸으로 한껏 호흡하며 살았던 시절이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그 만큼의 새로운 세계를 보았다. 첫사랑을 만나, 연애에 몰두했다. 누군가를 마음 깊이 동경하고, 그 빛에 매혹되기도 했다.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하신 공동체인 지토(연세대 법대 내의 기독교인 모임)를 알았다. 사람이 마음을 담아 만들어 낸 모든 것들을 보고 듣고 느꼈다.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마음 맞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즐겼다. 때로는 요령이 없어 실수도 하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고, 상처 받기도 하고, 후회와 자책도 했다. 그렇게, 처음으로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온 듯 살았다.


나의 청소년기는 보편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나 스스로는 대학교에서 그 시기를 보낼 수 있었음을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고등학교에 갔었더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분명히 그 결락은 내가 오래도록 지고 가야 할 짐이다. 하지만 나는 고등학교 생활을 거치지 않음으로써 내 안에 있던 몇 개의 가능성들을 부서지지 않은 채로 20대까지 가져 올 수 있었던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건 나에게는 퍽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의 나는 고등학교 생활과의 비교를 떠나 그 시절 자체에 감사하며 만족하고 있다. 
 
2003년, 열아홉의 봄에 고시생이 되었다. 2학년 2학기와 겨울방학을 학교 기숙사에서 보내면서 나는 거의 ‘방탕’ 이라는 것을 그림으로 그려놓은 듯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 겨울방학이 끝날 무렵, 더 이상 이렇게 살다가는 이 흐름에서 한동안 빠져나올 수 없겠다는 것을 무의식의 차원에서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1학기가 시작되기 전날, 갑작스럽게 휴학을 결정하고 기숙사에서 짐을 뺐다. 그건 시험공부를 하기 위한 휴학이기도 했지만, 타성에 젖을 대로 젖은 그 생활로부터의 도망이기도 했다.


1차시험을 위한 1년 휴학이 일반적으로 얼마나 유효한 것인가와는 상관없이, 나는 그 때 휴학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 해에는 공부를 할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돌이켜 보면 그 휴학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었던 나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던 것도 같다.

 

그렇게 신림동에 들어갔다. 신림동 생활은 내겐 오히려 즐거운 것이었다. 혼자서 보내는 고요한 시간이 싫지 않았고, 무엇보다 나의 시간을 의미 있게 사용하고 있다는 그 충실감이 행복했다. 공부는 일반적인 학원 스케줄을 따라서 했다. 봄에는 기본강의를 듣고, 여름에는 판례강의를 듣고 미진한 부분을 보충하고, 가을에는 진도모의고사를 따라가고, 그 이후로는 혼자 정리한 것만을 시험 때까지 반복하는 과정을 따라갔다. 3년 전의 일이었고 특별히 남들과 다른 점도 없었으므로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가장 실력이 느는 것을 느꼈던 시기는 진도모강이 끝나고 기본서와 판례집만을 붙잡고 정리하며 반복했던 시기였다는 점만을 언급해 둔다.


그 해에, 나는 처음으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시작했다. 스터디를 이끌어 주시던 고마운 선배 영종이형을 통해서였는데, 점심식사를 마치고 혼자 교회로 기도하러 올라가시는 데에 어느 날부터인가 따라가서 함께 기도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처음으로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도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모태신앙인으로서 머리로 기독교를 믿어왔던 나는, 그 때로부터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비로소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매일의 기도시간은 기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들은 마치 일용할 양식과도 같이, 하루하루를 버텨낼 수 있는 힘이 되어 주었다. 1차시험 직전, 나는 하나님께 ‘사법시험 합격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합니다’라는 기도를 드렸다. 후에 알게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귀 기울여 듣고 계셨다.


그리고 2004년 봄, 46회 1차시험에 안정적인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이제 나는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1차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나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시험이 우습게 보였다. 재시에 떨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공부는 안 했다. 1차시험에 합격했다고 변호사 시켜주는 사람 아무도 없는데, 1차시험 합격했다고 다 끝난 것처럼 놀고 다녔다. 평균 공부시간이 3시간이나 되었을까. 매일 기도하러 가던 시간은 물론 잊혀진지 오래였다. 그런 상태로, 거의 12월까지를 깨끗하게 날려 버렸다.


정말로 부끄러우니까 길게 설명은 하지 않겠다. 12월부터 다시 독서실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하기는 했지만, 거의 아무런 밑천도 없는 상태에서 2순환 중반을 따라가는 건 역부족이었다. 차라리 그때부터라도 기본강의 테이프를 듣기 시작했더라면 더 나았을지 모르는데, 아무튼 그렇게 3순환 4순환을 허덕이며 따라가고, 47회 재시를 보게 되었다.


첫날 헌법과 행정법을 치고 나와서, 마음속으로 시험을 포기했다. 내 답안지를 떠올려 보고, 도저히 과락을 벗어날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정신적으로 완전히 거꾸러져 버렸다. 그 2차시험 4일은 정말로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다. 뭔가를 생각한다는 것 자체를 견딜 수 없어서, 밤에는 지쳐 잠들 때까지 몇 시간이고 멍하니 핸드폰을 붙잡고 테트리스를 했다. 사람이 이러다 미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렇게 넋이 나간 상태로 4일간을 보냈다.


그리고 10월, 47회 2차시험에 불합격했다.

 

인생에서 처음 겪는 실패는 정말이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아무도 없는 교회에 가서 하염없이 울며 기도했다. 잘못했다고, 교만한 나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이 주신 것을 내 손으로 부숴 버렸다고, 그렇게 울면서 기도했다. 그러고도 몇 달 동안은 아무것도 손에 잡히질 않아서, 하루 종일 영화나 보고 만화나 보고 현실도피를 하며 보냈다. 시험에 관련된 사람은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법대 건물 근처로도 잘 다니지 않았다. 게다가 작년에 우리 동아리는 재시 이상 2차생 7명 중 6명 합격이라는 경이적인 합격률을 기록했는데, 정말 붙어야 할 분들이 모두 붙어서 다행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하면서도, 합격자 감사모임 공지를 보았을 때는 마음이 왜 그렇게 안 좋던지.


그러나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건 부모님의 힘들어하시는 모습이었다.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을 흐르게 하는 건 자식으로서 정말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이 이야기는 그만두자.

 

11월, 떠밀리듯 1차시험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체력이 완전히 바닥나 있었던 터라, 매일같이 한 시간 넘게 운동을 하며 몸을 만들었다. 의외로, 강도 높은 운동으로 머릿속에서 잡생각을 지워버리는 것은 정신적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 신림동에는 아무래도 도저히 갈 엄두가 안 나서, 집에서 공부를 했다. 답답할 때는 한강고수부지로 내려가 테이프를 들으며 산책을 했다. 정말 공부에만 집중하고 싶어서, 핸드폰도 정지시켰다. 그렇게 억지로 공부를 계속하다 보니, 어느 순간 다시 공부하는 자세로 돌아갈 수 있었다.


처음 얼마간의 적응기간이 지나자, 공부는 그럭저럭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1회독 후에 47회 1차시험을 풀어 봤는데, 90점 가까운 점수가 나왔다. 모의고사 점수도 나쁘지 않았다. 책을 볼 때의 느낌도 괜찮았다. 12월 말부터는 몸도 마음도 다시 궤도에 오른 느낌이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활도 다시 시작했다. 매일 혼자 교회에 가서 기도하는 시간을 다시 가졌고, 하나님께서는 성경말씀을 통해 위로도 주시고 힘도 주셨다.

 

2006년 2월, 48회 1차시험 날이 되었다. 전날, 잠을 1시간밖에 자지 못했지만, 별 문제는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시험장에 갔다. 그런데, 그것이 치명적이었다. 안 그래도 헌법이 너무 어렵게 느껴져서 1교시 끝나고 억지로 힘을 내고 있었는데, 형법은 기계적으로 골라낼 수 있는 문제가 하나도 없고 모두 깊이 생각해서 풀어야 하는 문제들이었다. 정말로 뻔히 알고 있는 학설이 머리가 안 돌아가서 사례와 연결이 안 될 때의 그 참담한 기분이란... 민법은 무슨 정신으로 어떻게 풀었는지도 모르겠다.


집에 와서 채점을 하고, 점수를 내 보니 80.28이었다. (헌법 1번부터 10번까지 중에 7개 틀렸을 때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기절할 뻔했다.) 지난 몇 년간 커트라인을 얼추 맞춰 온, 주위의 발이 넓은 선배들에게 전화해 보니, 아무리 그래도 82점 밑으로는 힘들 것 같다는 게 중론이었다. 그 날 저녁, 1차시험 불합격을 확신했다.
 
시험이 무섭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앞으로 1년 전력투구해서 준비해도 내년 1차시험 붙는다는 보장도 없고, 1차시험 또 붙어도 더 무서운 2차시험 봐야 하고... 이제 정말이지 더 이상 시험보고 싶지 않다고, 이 시험이 너무나 잔인하고 무섭다고 생각했다.


한강 둔치에 누워서,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아니 계시기는 한 거냐고 기도 아닌 기도를 했다. 나는 분명히 하나님과 함께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다고 생각하며 다시 공부해 왔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하고 생각했다. 나에게 보여주셨던 많은 것들은 대체 뭐였나 하는 원망만 나왔다.


그 후로 이틀간의 일들은 내가 평생 마음속에 품고 가야할 것들이다. 그 이틀 동안 나는 내 인생의 바닥부터를 하나하나 다시 결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틀 후, 마침내 나는 하나님 앞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나는 결국 하나님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 날 나의 일기장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다.

 

나는 비로소 내가 나의 하나님 앞에서 무엇 하나 내세울 것이 없음을 깨닫는다. 욥과 함께하셨던 그 하나님이 나에게도 찾아오셨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에 있었느냐고 하는 일갈이 나의 마음 가운데로 떨어진다.


이제야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되는 것은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하는 사실이다. 모든 일에 대해서, 심지어 나 자신에 대해서도, 결코 나에게는 주권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평생 살아가야 할 길은 소유권자로서가 아닌 선량한 관리자로서의 삶인 것이다.


시간을 들여 나를 다듬어 가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대로 부족한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 23:10)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하박국 3:17-18)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다니엘 3:17-18)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린도전서 13:7)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내가 1차시험을 앞두고 했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반문이었다. 바로 ‘네가 정말로 나를 사랑하느냐. 사법시험과 상관없이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하는 질문이었던 것이다. 그 질문에,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했다. 나에게는 하나님밖에 없지만, 하나님만 있으면 나는 괜찮다고, 그러니까 하나님, 나를 버리지 말아 달라고, 나를 붙잡아 달라고, 그렇게 기도했다.
 
49회 1차시험은 여름부터 준비해도 될 거라고 생각하고, 아무에게도 1차시험 성적을 말하지 않은 채로 3월에 신림동에 들어가서 혼자 2차 3순환 공부를 시작했다. 지금 공부하는 걸 2차시험장에서 쓸 수 없게 될 지도 모른다는 기분은 참 힘든 것이었지만,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며,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4월, 1차시험에 합격했다. 커트라인은 79.57이었다.


48회 2차시험은 지난 시험들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볼 수 있었다. 잠도 6시간 정도씩은 자고, 책은 볼 수 있는 만큼 보고, 아는 것만 침착하게 쓰고 나오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4일의 강행군을 무사히 마쳤다.


10월 12일, 2차시험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있었다. 11월 말, 법무부에서 전화가 왔다. 최연소 합격이라고 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작품이었다.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이라는 뜻으로, 바하가 자신의 모든 작품의 말미에 써 넣었다는 글귀이다. 나는 아직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잘 말할 수 없지만, 누군가가 나의 인생을 보며 하나님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나는 대단히 연약하고 부끄러운 기독교인이지만, 내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소망한다.


나는 나의 밝은 미래를 믿는다. 나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무엇 하나 할 수 없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 어쩌면 사법시험을 통해 내가 배운 것은 이것 한 가지 뿐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나는 한 시절을 딛고, 미래를 향한다. 사법시험은 나에게 있어 길고도 어두운 터널이었지만, 그 터널을 지나오며 배웠던 것들을 나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3차시험을 본 직후에 개인적인 공간에 썼던 글을 옮겨 두며, 합격수기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부끄러운 이 글을 맺으려 한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오늘의 나를 있게 해 준 고마운 사람들에게 마음으로부터의 감사를 전하며.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에, "지금 내가 신촌 지하철역에서 교통카드를 찍고 개찰구를 통과한다면... 나는 눈물이 날 것만 같다" 고 누군가에게 이야기했던 일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단순한 일상, 내가 아닌 다른 많은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평범한 일상이, 그 날들의 나에게는 그토록 사무치게 부럽고 절실했던 것이죠. 아침에 일찍 일어나느라 조금 피곤하고, 지하철에서 사람들에 치이는, 무엇 하나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하루하루가, 너무나도 그리웠던 겁니다. 그건,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100% 이해했다고 말하기 힘든' 종류의 기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직도 사법시험을 잘 모르겠습니다. 올해 2월 말의 어느 날에는 '이제 나는 이 시험이 너무 무섭다' 는 생각을 했던 것 같고, 후배들의 질문에 조언이랍시고 이것저것 주워섬기고 있는 지금에도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정말로 아주 약간만 어긋났더라면, 오늘의 나는 1차 OMR카드를 찍고 있었을 테니까요. 그 생각을 하면 정말이지 뭐라고 말로 표현하기 힘든 기분이 됩니다.


조금만 눈을 돌려 보면, 아침에 눈을 뜨고 호흡하며 하루를 누릴 수 있는 것을 극히 당연한 권리로 알고 살아가고 있는 내 가까운 주위에, 골수이식 수술날을 잡아놓고 갑작스런 폐렴 때문에 수술이 연기된 지윤이가 있습니다. 엊그제에도 교회에서 지윤이 아버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문득 그 의연한 모습이 너무나도 슬프고 안타깝게 다가옵니다.


사실 수백명의 해걸이 3시생들에게, 그리고 지윤이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해줄 수 있는 건 고사하고, 이런 이야기를 입에 담을 자격조차 없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들과 내가 무엇 하나 다를 바 없다는 사실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올해 1차시험 발표날, 게시판에서 "내가 해걸이 3시생이 되다니..." 라는 누군가의 슬픈 글을 보며 내가 느꼈던 것은 다행스러움이 아닌,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민망함과 무력감이었습니다.


공식적으로 사법시험의 모든 과정이 끝났습니다. 결코 기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지난 10월 12일부터의 모든 순간은 행복했습니다. 다만 나는 내가 해걸이 3시생들과 지윤이를 잊게 되지 않을까, 그것이 걱정됩니다. 나에게 대단하다고, 훌륭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나를 지켜갈 자신이 없습니다.


나는 아마도 멀지 않은 미래에 법조인이 될 것입니다. 영국의 대법관이었던 토마스 모어는 준엄한 법복 아래에 일부러 생채기가 날 정도로 거친 옷을 입었다고 하는데, 법조인으로서의 나에게 필요한 것은 아마도 그런 자세일 테지요. 다만 겸손과 충성을 구할 뿐입니다. 그리고 또한, 잊지 않기를, 변치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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