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격기]"내가 실패하면 어머니가 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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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격기]"내가 실패하면 어머니가 우신다"
  • 법률저널 편집부
  • 승인 2008.08.04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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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호 변리사 나우특허법률사무소 한빛지적소유센터 특허전임

 

안녕하십니까? 저는 40회 변리사 시험에 합격한 김현호 라고 합니다. 합격수기를 읽으시는 목적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합격자의 공부방법의 답습일수도 있고, 선행자가 겪은 어려움의 간접체험일수도 있고,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게는 위안을 얻기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수기를 쓰고 읽는 중요한 목적은 후자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합격수기에는 정해진 형식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합격수기에서 제 인생에서 변리사 시험과 관련된 부분을 발췌하여 보여드리는 형식을 취하겠습니다.

 

먼저 변리사 시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군대를 제대하고 3학년을 마쳐가던 1999년 가을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도 신문기사에 전문직 연봉순위 중 변리사는 연봉순위에서 1위를 고수하고 있었고, 당연히 이공계생인 저로서는 변리사란 직업에 동경과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인터넷을 통해 시험제도에 대한 검색을 하다가, 시험과목에 민법과 특허법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이걸 어떻게 공부하나 하는 생각에 마음을 접었습니다. 그리고 겨울방학동안 4학년에 올라가기 전에 다시 한번 진로를 생각하다 변리사시험에의 도전여부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2년여의 군 생활은 제게 거대조직의 비합리와 비효율을 체험하게 했고, 그런 이유로 대기업에서의 직장생활은 저의 성격과 맞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게 했던 차였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2000년 2월에 특허법을 수강 등록하였다가 첫 수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마음을 바꾸고는 환불을 받고 돌아왔을 정도로 그 긴 여정의 출발선에서 매우 많은 망설임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많은 분들이 고시에 도전하다 인생을 허비하는 것을 보았기에 저도 그 두려움이 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 군 휴학을 제외하고는 한번도 휴학을 해보지 않았던 터라, 2000년도의 4학년 1학기를 마친 후에 1년간의 휴학을 결정했습니다. 1년만 도전해보고 안되면 다시 복학할 생각이었습니다.

 

2000년 7월부터 시험 준비를 해서, 다음해 2001년 4월 9일에 있었던 1차 시험에서 커트라인에서 10점이 상회하는 점수로 합격을 하게 되었습니다. 스스로에게 대견했고, 주변에서도 칭찬의 소리가 높아서 우쭐했던 기억이 납니다.


원래 남들보다 조바심이 많은 편이라 1차 시험을 친후 그 날 하루를 쉬고는 바로 2차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신림동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자격증수당으로 나오는 한달에 25만원정도의 생활비로는 신림동은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학교 중앙도서관에서 공부하며, 학교식당의 밥을 사먹으면 30만원정도면 간신히 고시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고시시작이전에 과외를 해서 모아둔 돈이 있었기에 학원비를 충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 해 처음 치는 2차 시험에 붙으리란 헛된 기대는 아예 하지도 않고, 마지막으로 대전에서 본 38회 시험에 대비한 준비를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수험생은 동차시험에 대비해 예상단문 30개씩을 암기하고 들어갔지만, 이것이 저에게는 요행을 바라는 듯한 모습으로 보였기에 묵묵히 선택과목인 회로이론과 민사소송법을 공부하였습니다.

 

당연히 그해 시험에는 실패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대전에서 돌아온 날부터 2002년의 시험을 대비한 2차 공부를 했습니다.

 

이때부터 공부에 가속이 붙어서 모든 시간을 제외하고 공부에만 전념하는 시간이 하루에 13시간에서 14시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1,2차를 통틀어 시험 준비기간 동안 갖은 술자리가 5번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추석과 설날에도 친척들을 만나러 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야말로 하루도 쉬지 않고 공부를 했습니다. 스스로도 대견하게 생각했고, 설마 이렇게 까지 했는데 떨어지겠느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험기간 내내 목표로 삼았던 것은 2차 시험장에서 나올 때는 전력을 소진한 빈껍데기가 되어서 나오겠다는 것이었고, 저는 실제로 그러한 과정과 시험을 치렀다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발표를 기다리면서도 전혀 떨리지 않았습니다. 모든 과목의 답안이 만족스러웠으며, 또한, 내가 그렇게까지 노력했는데 떨어질 리는 없다는 막연한 자만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특허법 39점으로 과락을 받은 불합격이었습니다. 정말 꿈만 같았습니다.

 

결과를 안 순간, 순간적으로 제 주변은 거대한 진공의 구로 둘러싸인 느낌이었습니다. 어머님께 결과를 말씀드릴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았고, 친구의 위로주 한잔에도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취기와 분노가 올라와 술도 마실 수도 없었습니다.


그때 합격을 했으면 비교적 빠른 성취를 이룬 편이었는데, 간발의 차이로 떨어지고 나니 바로 다음해에는 29세의 고시생이 되어버리더군요.

 

발표가 난 후에 주말 이틀 동안에는 2차 시험을 친후 떨어질 때를 대비해 해왔던 과외를 정리했습니다. 학부모님에게는 죄송스럽지만, 건강이 안 좋아져서 과외를 그만해야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시 월요일에 책가방을 싸서 학교에 나가는데 예전에 아들이 입대할 때도 울지 않던 어머니가 다시 공부를 해야 한다는게 기가 막히다고 하시며 펑펑 우시더군요.

 

어머니를 달래드리고 학교도서관에 나가 지갑을 정리하는 데 2차 시험을 준비하면서 제가 작성한 메모를 발견했습니다. ‘내가 실패하면 어머니가 우신다.

 

세상 무엇이 와도 내 그것만은 막으리라’라는 메모였습니다. 저는 메모를 보고 그 조용한 도서관에서 엎드려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정말 세상이 원망스럽더군요. 주변의 친구들도 아무도 제가 떨어질 거란 생각을 못했던지, 감히 위로의 말도 건네지 못하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1차를 준비해야 했기 때문에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신정연휴에 공부할 곳이 없어 학교에 나갔는데 유일하게 중앙도서관만이 난방을 틀어주고 있었습니다.

 

공대 도서관에 있다가 추워서 집중이 되지 않아 중앙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평소 안면만 있던 고시생들이 저를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짓더군요.

 

불편해서 도서관을 나와서 공부할 곳을 찾는데, 그 넓은 학교에 춥지 않게 공부할 만한 곳이 없더군요. 책가방을 메고 이 강의실 저 강의실 전전하는데 정말 서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교 중앙도서관에는 더 이상 나갈 수 없을 것 같았고, 가끔 학원수업을 들으려 신촌을 지나칠 때도 아는 사람을 마주칠까봐 사람이 없는 길로 돌아서 다녔습니다. 남자가 그 정도에 그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느냐고 하실지 모르지만, 그 때의 제심정은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집 앞의 독서실을 끊고서, 집에서 밥을 먹으며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어머니는 매일매일 저의 저녁식사를 정성스레 준비하시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마침 아버지도 직장을 퇴직한 터라, 저녁식사분위기는 정말 무겁기 그지없었습니다. 억지로 밝은 척 밥을 먹었고, 그건 저뿐만이 아니라 저의 어머님, 아버지 모두가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부모님 눈에서 보이지 않는 것이 걱정을 더는 일이라 생각했던 저는 집에 들어와서 식탁에 앉기 무섭게 밥을 먹었고, 식사를 마치고는 물을 마시면서 신발을 신었습니다. 그리고 겨울 저녁에 독서실로 돌아 갈 때면, 정말 가슴에 커다란 물통이 담겨져 있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가슴이 답답하고, 걸을 때마다 가슴에서 물이 출렁거려 눈으로 목으로  흘러나오는 듯했습니다. 오랫동안 몸에 익은 새벽 2시까지 공부하고 오전 10시쯤 일어나는 생활패턴을 도저히 바꾸지 못해서, 어머니는 아침 일찍 일어나시고도 제 머리맡을 떠나지 못하셨습니다.

 

공부하는 나이 든 아들의 아침을 챙겨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이 너무나 죄송했지만, 도저히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잠자리에 드는 생활습관으로의 전환은 불가능해보였습니다.


1차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잠자리에 들 때면, 군인이 헤어진 옛 애인을 생각하듯, 떨어졌던 작년의 2차 시험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시험장에서의 내모습, 시험문제, 내가 쓴 답안이 생각나며 저를 안타깝게 했습니다.

 

헤어진 애인이야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고 단념을 하면 그만이지만, 떨어진 시험은 시간이 지날수록 생생하게 괴롭히고, 도저히 단념을 할 수가 없는 존재였습니다. 심지어는 점수의 합산이 잘못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문항별 채점결과를 확인하고 난후에는 합산이 잘못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거두었지만, 이제는 채점기준을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었기 때문에, 패배를 깨끗이 인정하고 마음속에서 분노를 잠재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다시 영어 단어를 암기하고 독해를 하고, 2년 전의 기본서을 꺼내어 기억을 되살렸습니다. 그 때의 기분은 군대시절 유격훈련을 받을 때 전날 입었던 땀과 진흙투성이인의 새벽공기에 차갑게 식은 유격복을 다시 입고 훈련을 받으러 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다시 훈련을 받다보면 입기 싫었던 옷이 편안한 훈련복이 되듯이, 처음에는 다시 보기도 역겨운 책들이 곧 제게는 친숙한 무기가 되더군요.

 

하루하루를 그렇게 보내다 어느덧 날씨는 따뜻해졌고 1차 시험을 치루고 나서 혼자서 채점을 한 결과 77점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제가 처음 붙었던 38회 1차 시험의 커트라인이 그 정도였으며, 저는 개인적으로 그때보다 문제가 더 쉬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차시험에 떨어졌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그때의 절망감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혼자서 고민하다가 다음날 일어나서 주위에 연락을 해보니, 문제가 매우 어려웠으며 그 결과 커트라인이 60점이 될 거라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저는 안도했고, 바로 독서실로 가서 민사소송법의 기억을 되살리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1차 가채점결과가 발표되어서, 예상 커트라인보다 거의 20점이 넘는 점수로 합격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마음 편히 2차를 준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차 시험을 준비하는 중에 수험생의 요구로 특허청이 우수답안을 공개하였습니다. 스스로의  반성을 위하여 모범답안을 살펴보았지만, 특허법과 상표법의 우수답안일부에 납득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우수답안대로라면, 주관식시험은 출제자의 주관이 문제에 반영되어야 함에도, 문제 상에는 그 주관이 드러나 있지 않았으며, 채점기준은 문제 상에 반영되어 있지도 않은 출제자의 주관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몹시 분했지만, 재도전을 3개월여 남겨둔 시점에서 분노는 저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공부하다가도 갑작스레 찾아드는 시험제도와 자신에 대한 분노를 달래며, 하루하루 설욕을 위해 칼을 갈았습니다. 


그 후 3개월간의 2차 준비는 하루하루 100미터 달리기를 쉬지 않고 하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시험 10일전부터는 평균 4시간정도밖에 자지 못했습니다.

 

이는 그전의 2차 시험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시험장에서의 상황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2002년의 39회 2차 시험장에서는 똑같이 수면부족이었어도, 전혀 졸리거나 머리가 멍하지 않았는데, 이번 시험에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졸음과 멍한 정신 상태가 계속되었습니다.

 

그 결과 상표와 민사소송을 거의 멍한 상태에서 문제를 읽고 답안을 썼습니다. 멍한 상태로 시험을 보면서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들어 마음속으로 울부짖었지만, 그래도 머리는 맑아지지 않았습니다.

 

특허법은 시간에 쫓겨 무슨 내용을 썼는지는 커녕 문제도 잘 기억나지 않았고, 회로이론은 역시나 어려워서, 답안지를 걷어갈 때까지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풀었던 기억이 납니다.


시험을 보고나서 합격자 발표 전까지 또다시 고시생만이 누릴 수 있는 긴 휴가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랜 수감생활 중에 불합격을 해제조건으로 부여받은 외박이라고 할까요? 

 

당시 제 나이가 취업 마지막 연령이어서, 나중에 다닐지 여부를 결정하더라도, 취업을 시도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기업에 이력서도 내고 면접도 보았습니다.

 

원하지도 않았던 취업문을 기웃거리다보니 어느덧 발표가 임박해왔습니다.


발표전날 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직장일로 고단한 친구는 술한잔 하자는 제 부탁을 거절했습니다. 저는 자주 가던 신촌 굴다리 밑의 나루터란 술집에 들어갔습니다.

 

주인아주머니에게 친구가 올꺼라고 말하고는 술잔을 두개 받아서 제 앞자리에 한개의 술잔을 놓았습니다. 제 가방은 앞의 빈자리에 놓고 누가 보면 둘이 왔는데 친구가 잠깐 화장실에 간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는 소주를 마셨습니다.

 

39회 발표가 오후 2시쯤 났었기 때문에 저는 이번에도 그럴 거라 생각하고 아예 늦잠을 자고 학교에 나가 심판의 결과를 받아들이려고 했습니다.

 

부모님께는 크리스마스 경에 발표가 난다고 진작에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소주를 그렇게 마셨는데도 아침 10시에 눈이 떠지는 것이었습니다.


잠이 덜 깬 멍한 정신상태에서 가슴은 또 약하게 뛰기 시작했습니다. 부모님께는 태연한 척하고, 세수를 하러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며 어머니가 전화기를 넘겨주셨습니다.

 

친구의 첫마디가 ‘축하한다’ 였습니다.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친구에게 수험번호를 확인받고는 밖으로 뛰쳐나가서 부모님께 외쳤습니다.

 

‘엄마, 저 합격했데요!’ 저도 부모님모두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떨어졌을 때도 그렇더니 합격했을 때도 꿈만 같았습니다. 제가 수험기간에 읽었던 수기 중에 아무리 고생이 길고 험난해도 기억하지 않으면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과, 합격이라는 소식에 그 모든 고생이 봄눈 녹듯 녹는다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점수를 확인해보니 당연히 몽롱하게 답안을 썼던 상표와 민사소송법 두 과목의 점수가 가장 좋지 않았고, 다행히 특허법과 선택과목에서 좋은 점수가 나왔습니다. 물론 저보다 더 오랜 기간을 공부하신 분들도 계시고 아직도 수험가에서 분투를 하고 계시는 분들이 많을 줄로 압니다.

 

하지만, 제가 이글을 쓴 이유는 개인적인 자랑을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제가 겪은 고난의 끝에서 저는 합격수기의 몇몇 구절을 되새기며 용기를 내었고, 이제는 제가 그런 힘든 상황에 처한 분들에게 힘을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실의에 빠진 저에게 어머니가 해주신 ‘소중한 것은 절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을 되새겨 봅니다.

 

또한, 요즘 들어 가끔씩 변리사의 전망이 밝지 않다는 말들로 수험생의 기운을 빼는 경우를 보곤 합니다. 하지만, 그런 글이나 말을 내뱉는 주체는 변리사가 아니거나, 변리사이더라도, 제한된 정보와 경험을 갖고 있거나, 현 상황에서 희망을 보지 못하거나, 심지어는 보려고 하지 않는 이들입니다.

 

전 제가 한 선택에 일말의 후회도 없으며, 변리사란 직업은 갖기 위해 젊음을 바쳐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읽으신 모든 수험생들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끝으로 못난 아들을 끝까지 믿어주신 부모님께 깊은 감사드리며, 수험기간 내내 정신적 지주가 되어준 태영이, 언제나 나를 믿어준 성익이, 경현이, 상민이, 성태, 종한이, 여정에게 진정한 고마움을 표합니다.

 

또한 한결같이 나를 응원해준 윤기, 진원이, 현상이, 훈규, 영훈, 기정, 원조에게도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주길 바랍니다. 또한 부족한 선배를 한결같이 믿어준 규민이, 형근이, 창진이, 연호에게 자랑스러운 선배가 될 것을 약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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