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Obama)와 케네디(Kenne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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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Obama)와 케네디(Kennedy)
  • 법률저널
  • 승인 2008.02.21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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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정학의 숲에서 거닐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열렬한 케네디 추종자였다. 그의 아내 힐러리 클린턴은 남편의 후광을 업고 현재 민주당 대통령 예비후보로 나서고 있다. 케네디 가문에서는 힐러리가 아니라 오바마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오바마가 ‘흑인 케네디’란다. 선거운동 초기에 흑인들은 오바마가 아니라 힐러리를 지지하였다. 필자가 옛날에 쓴 글을 읽으신 분들은 알 것이다. 왜 초기에 흑인들은 오바마를 지지하지 않았는지. 왜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하였는지. 이제는 서서히 오바마 쪽으로 인심이 쏠리고 있다. 오바마가 대세다. 
  버락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간에는 공통분모가 있다. 눈치 빠른 분은 이미 아실 것이다. 바로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이다. 이번 주에는 케네디가 흑인 사회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은 리처드 닉슨(R. Nixon)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 민주당은 존 케네디(John F. Kennedy)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 당시 미국의 주류사회는 카톨릭 신자인 케네디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프로테스탄트 국가인 미국에서 카톨릭 신자가 대통령이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또한 카톨릭 신자 가운데에는 빈민이 많았는데, 케네디의 당선이 사회주의의 대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도 우려하는 사람이 많았다.
  선거 결과 민주당 후보인 케네디가 승리하게 된다. 케네디 대통령은 뉴프런티어라는 이름으로 뉴딜 진보주의(New Deal liberalism)의 개혁 정신을 다시금 불러일으킨다. 이의 주요 목표는 풍요의 그늘 밑에 가려져 있는 빈곤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이 전에는 미국사회에서는 빈곤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빈민은 주로 이민자들이었기에 이들이 미국사회에 정착하게 되면 빈곤 상태는 자연스럽게 해결되리라 보았다. 그러나 1960년대 빈민은 이전과는 그 성격이 달랐다. 빈곤을 후손들에게 대물림하는 성격이 강했다는 것이다. 
  케네디 행정부는 정부 개입을 통해 빈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애팔래치아 빈곤 지대를 개발하고, 노인 의료 보험(Medicare)을 도입하려는 법안을 의회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공화당과 이에 동조하는 민주당 남부 세력의 반대로 부결되고 만다.
  케네디는 민권운동을 지지하였다. 케네디 대통령과 그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은 흑인들에 대해 동정적이었다. 대중교통 수단에서의 인종 차별을 철폐하고, 흑인의 투표권 행사를 보장해 주려고 하였다. 
  1962년 미시시피 대학이 흑인 청년 제임스 메레디스(James Meredith)의 입학을 거부했을 때 그를 보호하기위해 연방군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이 흑인 청년은 이제 노년에 접어들었는데, 얼마전 케이블 티브이에서 인터뷰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케네디 행정부의 개혁 노력은 급격한 변화를 원하는 흑인 행동주의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였다. 흑인들은 1963년 4월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목사를 중심으로 앨라배마의 버밍햄에서 상점, 식당, 고용에서의 인종 차별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앨라배마 경찰은 시위대를 해산하는 과정에서 소방 호스, 경찰견, 가축몰이 전기 방망이를 사용하였다.
  6월에는 앨라배마 주지사 조지 윌리스가 흑인 학생 2명의 주립 대학 입학을 막자, 케네디 대통령은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인종 차별주의자들을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다. 방송이 있었던 그날 밤 유색인 지위 향상 협회(NAACP) 미시시피 지부장인 메드가 에버스가 백인에게  살해당했다. 몇 달 후에는 앨라배마 흑인 교회에서 폭탄이 터져 4명의 흑인 어린이가 죽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에 대한 항의로 민권 운동가들은 1963년 8월에 워싱턴의 링컨 기념관 앞에서 25만명이 참석한 대집회를 열었다. 여기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나는 꿈을 가지고 있다(I have a dream).”는 그 유명한 연설로 인종 차별이 없는 사회의 건설을 호소하였다. 
  케네디 형제를 비롯한 많은 진보주의자들은 흑인들의 불평등한 처지에 동정적이었다. 하지만 이들 또한 사회의 소수세력이었기에 그들만의 힘으로는 뿌리 깊은 인종 차별의 사회 관습을 없앨 수 없었다. 그 때문에 흑인들 속에서는 독자적으로 평등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흑인 민주주의(Black nationalism)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약 40여년이 지난 지금 흑인들의 이상(理想)이 서서히 실현되기 시작하고 있다. 바로 오바마 후보를 통해서 말이다. 미국이 영국으로 독립한 이후 최초로 흑인 대통령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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