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무서운 적은 자만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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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무서운 적은 자만심이었다
  • 법률저널 편집부
  • 승인 2002.01.04 17: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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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부승
1975년생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 재학
제34회 외무고시 1부 수석합격

 

   합격하고 일주일 동안은 정말 정신이 없었다. 몰려오는 전화, 축전, 인터뷰 요청에 눈코뜰 새가 없었다. 어머니께서는 연신 "이게 꿈이야 생시야"를 연발하셨다. 나도 기뻤다. 그러나 그 기쁨을 가라앉히고 눈을 감자 눈 앞엔 지난 몇 년간의 쓰라린 고통이 떠올랐다.


  맨처음 2차시험을 본 것은 97년이지만, 그것은 경험삼아 보았던 것이고,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2차를 본 것은 98년 4월 그러니까 내가 병장을 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시험이 끝나고 바로, 작전 차 대구에 내려갔고, 올라와 보니 어느새 한 달이 지나, 합격발표가 가까와져 있었다. 발표 전날 나는 공교롭게도 당직이었다.


  12시가 되자 나는 자리를 잠시 후임병에게 맡기고 부대 앞에 있는 공중전화로 갔다. 수화기에서는 "명단에 없습니다"라는 기계음이 흘러 나왔다.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잘못 눌렀을 거야." 다시 눌러 보았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전화박스 문을 힘겹게 닫고 나오며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는데,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왜 그리도 행복해 보이는지. 세상에서 오로지 나만이 절망의 구렁텅이에 던져진 것 같았다. 당직실까지 터벅터벅 걸어 돌아오는 그 길이 그렇게 멀 수가 없었다.


  당직실에는 십여명의 후임병들이 모여 있었다. 내게로 쏟아지는 20여개의 눈동자. 그 중 한 녀석이 입을 열었다. "장병장님 어떻게 되었습니까?" 약간의 정적이 흐른 후, 나는 결과를 말해 주었다. 나는 아직도 그때 그 녀석들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기뻐할 준비를 잔뜩 하고 있다가 김이 샌 듯한, 그러면서도 불쌍해하는 듯한 그 표정. 뭔가 위로의 말은 건네야겠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우물쭈물하던 그 표정. 결국 몇 녀석이 의례적인 위로의 말을 몇 마디 하더니, 어색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했는지, 아이들은 하나씩 둘씩 당직실을 떠났다. 당직실엔 나 혼자 남았다. 그 날밤에는 전화도 오지 않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날이 밝자 나는 옷을 갈아 입고, 몸을 씻고 나서 잠자리에 들었다.


   그 후 8월까지는 공부를 안 했다. 다시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제대를 한 달 앞 둔 8월 말 경이었다. 명예회복을 위해선 반드시 동차로 붙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이듬해 2차에서 나는 또 떨어졌다. 0.6점 차이, 총점으로는 3.96점이 모자랐다. 국제법이 41점이니, 45점만 받았어도 붙었을텐데. 그날 나는 집에 돌아와 문을 걸어 잠그고, 소리가 새어 나갈까봐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숨죽여 가며, 꺼이꺼이 흐느껴 울었다. 그 날 내가 그렇게도 울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떨어진 것이 한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나 자신의 자만심과 허술한 태도가 너무나도 미웠다. 사실 98년도에 떨어진 것도, 가장 커다란 요인은 자만심에 있었다. 고시공부를 전혀 안하다가, 시작한 지 50일만에 1차에 붙었다는 사실이 나의 자만심을 부채질했고, 허술한 생활태도를 낳은 것이다. 한 번의 낙방도 이 자만심을 치유하지는 못했다. 98년 9월에 복학하면서 나는 학점을 올리려는 요량으로 무려 7과목이나 신청하였고, 그 중 5과목은 고시와 무관한 철학·문학관련 수업이었다. 도대체 뭘 믿고 그랬는지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차로 붙을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나의 당치 않은 자신감에 두 번이나 배반을 당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내가 지금껏 목검승부를 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목검을 들고 칼싸움을 하는 한은 아무래도 진지해지기가 어렵다. 내가 진검승부를 하고 있다는 것, 태평스럽게 허술한 태도를 취하다가는 언제 목이 날아갈지 모른다는 사실을 두 번의 낙방을 거치고 나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날부터 나는 열심히 공부했다. 하루하루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잠을 못 자서 피곤했고, 눈이 아프고 허리가 쑤셨다. 설사가 계속됐다. 그리고 외로웠다. 하지만 나는 그때마다 내가 떨어지던 때를 떠올렸다. 나를 보면서도 눈 둘 곳을 몰라 우물쭈물하던 20여개의 눈동자를 떠올렸고, 자만심에 속아 두 번이나 굴러떨어지던 나의 모습을 상기했다. 다시는 그 쓰라린 고통을 반복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2차를 보았다.


  합격을 하려면 물론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수석을 하는 데는 운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수석합격을 한 것은 경제학에서의 고득점에 힘입은 바가 크다. 99년에 낙방을 하고 나서, 나는 나만의 독특한 카드를 개발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두 달 간 경제수학을 파고들었다. 두 달만에 두툼한 경제수학책을 떼고 나니 경제학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었다. 모형들을 모두 수학공식화하여 암기하고 답안을 쓸 때에도 가급적 수학적으로 표현하려고 애썼다. 그런 태도가 아마도 채점위원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던 것 같다. 게다가 H법학원에서 남재량 강사의 경제학 강의를 들었던 것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경제학의 기초를 잡지 못하여 방황하던 내가 남재량 선생님과 만나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혼신의 열정으로 강의에 임하여 주신 남선생님께 이 자리를 빌어 머리 숙여 감사 드린다.


  아버님께서도 고생이 크셨다. 30년 공직생활 마감을 앞에 두시고 바쁘시던 아버님께서는 아침으로, 밤으로 아들을 실어 나르셨다. 덕분에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한 시간 더 공부하고 한 시간 더 잘 수 있었다. 아들을 위해 기꺼이 당신을 희생하시는 아버님을 만난 것도 나에겐 커다란 행운이었다.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인 것 같다. 외무고시에 수석합격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진심어린 성원을 보내주고,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어 너무나도 행복하다. 고시합격을 목표로 지금 이 시각에도 열심히 분투하고 있을 동학·후학들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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