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급외 전용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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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급외 전용관"
  • 최용성
  • 승인 2001.09.13 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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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급제-사회경제적 검열의 또 다른 이름

 

미국에서는 1922년경부터 헤이즈 오피스 규정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 규정에 기하여 영화에 대한 검열이 이루어졌는데, 가장 중요한 기준은 영화 속의 부도덕하거나 사악한 인물들은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영화의 내용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영화 속의 악인들이 결말에 가서 처벌을 받거나 불행해지기만 하면 문제될 것이 없었다. 헤이즈 규정이 미국 중산층의 청교도 윤리와 영화 산업의 이익 사이의 교묘한 타협책이었기에 생겨난 결과였다. 이러한 헤이즈 규정의 약점을 간파하여 그 규제를 철저하게 잘 피해간 사람이 <십계>를  두 차례나 감독하였던 세실 B. 데밀이었다고 한다. 데밀은 성서를 소재로 하여 온갖 방탕한 죄악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뒤 신의 징벌로 마무리하는 방식을 즐겨 사용하였던 것이다. 헤이즈 규정이 힘을 잃기 시작한 것은 1952년에 <기적>이라는 이탈리아 영화에 대한 판결이 있고 나서부터이다. 그 뒤 1968년에 이르러 등급제가 도입되었다(스티븐 얼리 / 영화언어연구회 옮김, 『미국영화사』, 예건사 에서 주로 참조). 등급제가 도입되고 나서 검열은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여기에도 함정이 있다.
X 등급 영화를 포르노와 동일시하면서 유력 언론매체나 영화관에서 이를 외면하거나 광고조차 거부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다보니 상업적 성공을 위해서라도 X 등급을 받지 않으려고 영화인들이 먼저 자신의 영화를 ‘검열’하는 현상이 생겨났다. 이처럼 미국의 등급제도는 사회경제적으로 검열과 다를 바가 없어 이에 관하여 많은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도덕적 장치로 은폐되어지는 자유에 대한 억압

검열이 노리는 주목적은 체제에 대한 비판을 미리 봉쇄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그것을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면 권력에 여러 가지 부담이 따른다. 그래서 음란한 표현의 범람을 미리 막아 도덕을 지킨다는 ‘거짓’ 정당화 근거가 필요하게 된다. 불쾌감이나 성적  수치심을 자극하는, 점잖치 못한 부도덕한 행위에 대한 사전 검열이란 얼마나 고상한 일인가.  그 결과 전통적 도덕이 그 사회적 맥락을 잃어버린 채 권력의 필요에 따라 억압장치를 옹호하는 형식적인 기제로 작용하게 된다. 이처럼 검열이 우리의 부끄럽고 부도덕한 부분을 가리기 위한 도덕적 장치로 일단 인식되고 나면, 그것이 가지는 정치적 함의는 은폐되고 만다. 그러면 국민들은 검열을 일상적이고 당연한 행위로 마음 속 깊이 수용하고, 그에 도전하는 행위 자체를 비도덕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국가가 자신보다 우월한 존재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내면화된다. 그 결과 검열 말고도 국가제도가 행하는 다른 형태의 억압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게 된다.
이것은 국가주의 또는 파시즘의 일상화 과정이라고 할만하다. 여기서 주목하여야 할 점은 처음에는 성적 자유의 억압으로 출발한 것이 결국 모든 자유의 억압기제로 확장되고 마는 연쇄효과이다. 이는 성적 자유의 억압이 모든 억압의 원인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여러 자유가 서로 의존관계에 있기 때문에 생겨난 현상이다. 요컨대 나의 자유와 다른 사람의 자유는 결코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한국 검열의 현주소

우리 헌법이 추구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상세한 내용을 두고는 해석의 층위가 다양하게 존재하겠지만, 그 기저는 결국 하나로 통한다. 국가가 개인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지, 개인이 국가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국가가 국민을 가르치려고 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검열이란 무엇인가. 바로 국가가 국민이 ‘보아도 되는 것’과 ‘보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지어 미리 국민을 계도하겠다는 제도가 아닌가. 국가권력이 국민보다 높은 지위에서 국민 개개인을 유아(幼兒)처럼 보호하겠다는 이러한 발상이 자유민주주의와 조화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러니 헌법재판소가 1996년 영화에 대한 검열이 위헌임을 선언한 것은 당연하였다. 이것은 한국 영화사뿐만 아니라 자유의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만한 한 큰 사건이지만, 불행히도 구제도의 그늘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법. 오랜 세월 동안 검열은 우리들 마음속에 자유에 대한 두려움, 프롬 식으로 말하자면 자유에서 도피하려는 심리적 공백을 만들어 놓았다. 바로 그 틈 사이로 검열은 사라지지 않고 겉모습만 바꾸어 살아남았다. 특정한 영화에는 아예 등급 자체를 주지 않는 등급판정보류(이른바 등급외 판정)라는 이상한 제도가 바로 영화검열의 다른 이름이다. 장정일씨의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영화화한 장선우 감독의 <거짓말>은 두 차례나 등급 심의를 받았으나 결국 등급을 받지 못함으로써 ‘등급내’ 영화관에서 상영될 기회를 잃었다. 국제영화제에 출품되고 부산영화제에서는 일반에게 공개되었으며 외국에 수출까지 되는 우리영화에 대하여 국내에서는 등급을 줄 수 없단다. 이 일에 앞장 선 사람들이 그 동안 검열제도의 희생자였을 영화인들이었다는 사실에는 정말이지 할 말이 없다. 피해자가 가해자로 전화(轉化)되는 이 기막힌 아이러니!

정답이 될 수 없는 등급외 전용관

문제해결을 등급외 전용관에서 찾으려는 견해들이 많은 듯하다. 내년에 등급외 전용관을 허용하겠다던 여당의 방침이 있었지만 일단 백지화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등급외 전용관은 등급보류로 인하여 발생하는 검열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이 될 수 없다. 도대체 성인용 등급말고 달리 무슨 등급외가 필요하다는 말인가. 등급외에  어울릴만한 ‘등급외’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따로 존재하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게다가 등급외 전용관은 결국 포르노로 가득 찰 가능성이 높은데, 그렇게 되면 예술적이지만 야하여 등급외 판정을 받은 영화들은 등급외 전용관에서도 상영 기회를 얻지 못하거나 포르노로 오해받으며 상영되는 심대한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감독은 등급외 판정을 최대한 피하기 위하여 표현의 수위를 낮추지 않을 수 없다. 이게 검열과 무엇이 다른가. 

비록 영화 안에 우리의 성적 수치심을 자극하는 대목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가 국가주의 사회나 폐쇄 사회가 아닌 자유사회를 살기 위하여 치러야 하는 대가(對價)인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음란물에 대한 검열, 더 나아가 사후적 처벌을 자연스런 일로 생각하기 쉽다. 바로 그 과정에서 우리 자신이 자유에 대한 억압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내면적 태도를 가지게 되는 것이 진실로 두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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